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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셋풋볼

매직 머저르의 슬픈 그림자, 데아크 페렌츠

                                                                                                         글쓴이 : 바셋

크날두가 라리가 최단경기 100골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기존 기록은 50년대 매직 머저르 신화의 주인공 푸슈카시 페렌츠(헝가리)가 가지고 있었지요. 사실상 은퇴해 2년간 술에 찌들어 지내다 복귀하여 얻은 결과이니 그 천재성은 호날두를 능가했다 봐도 무관할 터입니다. 50, 60년대를 풍미한 푸슈카시의 기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습니다. “사기 유닛”. A매치 85경기 84골, 1부리그 528경기 517골(헝가리349골. 스페인179골)

크날두가 그렇듯 대스타들은 동시대 활동한 덜스타들의 존재감을 죽여 버리는 부작용을 만들어냅니다. 펠레 덕에 사상 최고의 브라질 수비진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마라도나 덕에 발다노와 부르차가는 처절히 조연으로 밀립니다. 포지션과 스타일까지 중복될 경우 대낮에 켜놓은 네온사인 마냥 주목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푸슈카시 역시 본의 아니게 전력만 낭비한 네온사인들을 양산시키고 맙니다. 헝가리 어르신들 중엔 당시 ‘푸슈카시’가 세계 최고 공격수였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진짜는 따로 있다?

‘마철’ 아이디를 쓰시는 독자분 요청도 있고 해 푸슈카시의 대표적 그림자 ‘데아크 페렌츠Deák Ferenc’에 대해 썰을 풀어봅니다.  

푸슈카시의 기록이 사기죄에 해당된다면 데아크는 사형감입니다. 1944/1945 한 시즌 34경기 66골. 이듬해 48골 그 이듬해 59골... 1부리그 통산 232경기 326골. A매치 20경기 29골.

훗날 독일에서 게르트 뮐러가 나타나자 대번에 이 선수와 비교되었습니다. 박스 안에서 공을 잡으면 어떤 식으로든 골을 넣습니다. 데아크는 뮐러와 달리 등빨까지 겸비하고 있었기에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했습니다. 이렇게 유럽 최고의 골잡이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앞에 웬 땅꼬마 하나가 등장하니... 그가 바로 푸슈카시 페렌츠였습니다.

정적인 플레이를 선호하던 데아크와 개인기의 화신, 천방지축 푸슈카시를 놓고 잴 때 헝가리 대표팀 입장에선 단연 푸슈카시가 더 필요했습니다. 신임 세베시 구스타프 감독은 이른바 포지션 파괴 토탈 축구를 꿈꾸던 인사였습니다. 세베시 감독은 체력과 주력이 쳐지는 선수를 기피했습니다. 허나 처음부터 데아크를 빼고 갈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베시 부임 초기 데아크-푸슈카시 투톱은 맹위를 떨칩니다. 데아크는 극단적 왼발잡이이자 ‘동산위에 올라서도 160’인 푸슈카시의 단점을 커버하기 안성맞춤이었죠. 이 공격 듀오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50년대 헝가리 팀의 이야기는 전설 그 이상이 되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 환상의 조합은 롱런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푸슈카시의 성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헝가리 축구의 축복으로 취급받으며 엘리트 코스를 질주한 푸슈카시는 경기 자체가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킬러’인데다 5살이나 많은 고참, 데아크에게 푸슈카시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길 수 없었습니다.

둘째. 헝가리 프로리그는 1926년에 시작됩니다. 즉 20여년이 흘러 이 사람들이 활동할 즈음엔 축구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분위기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헌데도 데아크 경우 병적이리만큼 아마추어리즘 혹은 스포츠 젠틀맨십에 집착합니다. 토리노, 갈라타 등 외국 클럽이 천문학적 연봉을 제시한들 처다도 보지 않던 그는 현실감각이 결여된 낭만주의자였고 세베시 감독은 이를 근성부족으로 풀이합니다.

마지막이자 결정적으로. 세베시 감독에겐 설사 데아크를 쓰고 싶다한들 쓰지 못하는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그의 기록을 보면 현역 활동 기간에 비해 리그 경기 출장수가 유난히 적다는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1부 리그 출전만 정리되었기 때문이지요. 데아크는 마음만 맞음 하부리그에서 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돈 따윈 상관없었습니다.

당시는 유럽 사회주의권 국가 대부분에서 주요 권력기관들이 축구 클럽을 인수해 경쟁적으로 유명 선수들을 뽑아나가던 시기였습니다. 헝가리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데아크 만큼은 순수한 시민구단 ‘페렌츠바로시’ 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공권력이 투입됩니다. 데아크를 정부 기관 축구팀에 끌어들이기 위해 회유와 협박이 이어지지만 데아크는 강렬히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는 반정부 인사로 찍힙니다.

세베시 감독은 위대한 축구 감독이기 이전에 친소 공산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그가 이룩한 신화는 이를 발판으로 구축된 정치적 파워 없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랬던 세베시였기에 권력이 싫어하는 선수들을 거두지 못합니다. 데아크의 축구 커리어는 암울했던 현대 헝가리사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950년 권력의 이적 압력을 참다못한 데아크가 국가 안기부 요원 둘을 두들겨 팬 사건이 발생합니다. 권력은 데아크에게 실형과 내무부 산하 ‘BP.도저 클럽’(현 우이페슈트)으로의 이적을 선택하게 합니다. 데아크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뒷배경을 몰랐던 성난 페렌츠바로시 팬들은 데아크의 초상화를 불태웁니다.

은퇴 후엔 헝가리 민주화 항쟁을 군화발로 쓸어버린 소련의 끄나풀 카다르 수상 경호원으로 근무합니다. 민중의 지지 기반이 없던 독재자에게 이보다 좋은 병풍이 또 어디 있었을까요? 같은 시기 푸슈카시로 대표되던 세베시의 아이들은 망명을 택하거나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독재에 저항합니다. 비교하여 “범버”란 애칭으로 국민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받았던 한 축구선수는 변절의 상징, 경멸의 대상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데아크 페렌츠는 평생 비난받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특히 냉전시대가 끝나고 헝가리에 반공, 반소 광풍이 불던 90년대 노년의 데아크 페렌츠는 대놓고 매국노급 취급을 당합니다. 미운 털이 박히니 뭔 짓을 해도 밉습니다. 헝가리 황금팀 초창기 그가 이룩한 혁혁한 전과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대표팀을 축으로한 전력 집중화 전략’이 헝가리 축구를 말아먹을 수도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집중포화를 맞아 지도자, 행정가로서의 축구 캐리어까지 끝장냅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현실이 되고 말지요.

세월이 흘러 때는 1997년. 피파 뮌헨 총회가 데아크 페렌츠에게 20세기 최고의 스트라이커 상을 수여합니다. 그때서야 헝가리 내에서 데아크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됩니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위대한 축구선수의 결백이 하나둘 밝혀집니다. 결국 그 역시 역사의 피해자였다는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물론 논란은 여전했습니다. 우리의 친일청산 문제와 비슷합니다.

헝가리 황금팀 영광의 순간순간이 중계될 때마다 의자를 뒤로 돌리고 눈물을 쏟던 아버지를 회상하는 그 따님의 헌사가 읽혀지는 가운데 2000년 드디어 전설의 공격수 데아크 페렌츠는 헝가리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됩니다. 헝가리 축협은 그의 정치적 행적에 대한 평가를 후세에게 미룹니다. 허나 그가 발군의 축구선수였고 그 탤런트로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줬던 점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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