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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셋풋볼

산시로의 챔피언

글쓴이. 바셋

 

 

 

 

마침 닐리리 팔리리 하던 시간에 녹화중계를 해주기에 정말 오랜만에 세리아 경기를 봤습니다. 정확히 언제 한 경기인지는 잘 모르겠는 밀라노 더비였지요.

 

 

 

경기 내용에는 별 감흥이 없었고, 그나마 인상에 박힌 건 인테르 팬들의 발로텔리를 향한 막가파식 인종차별 야유였습니다. 하여간 이 나라 국민들은 도무지 해답이 안 나옵니다. 씁쓸하더군요. 지금도, 심지어 자국 국민들 향해서도 저 따우로 구는 놈들에게 둘러싸여 당시 그 분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니 한숨이 나옵니다.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인테르와 아체의 공용 홈구장. 어느 날 잠실구장이 백인천 구장으로 명명되면 당연히 두산 팬들은 그냥 잠실이란 이름을 고수하겠지요. 그래서 AC밀란 쪽에선 그냥 산시로라고 부르고, 저도 단지 짧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고수하는 이탈리아 축구의 성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산시로에서 포효하신 최초의 한국 스포츠맨은 축구 선수가 아닙니다. 간만에 나타나 뜬금없이 복싱이야기를 좀 해보려합니다.

 

 

 

 

김기수 선수 다 아시죠? 한국 최초의 프로권투 챔피언 김기수가 타이틀을 반납한 곳이 바로 그곳 산시로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중계권료 수입이 미비했던 시기였기에 프로경기 흥행의 관건은 관중동원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산시로급 매머드 구장에서 복싱 경기를 여는 일은 흔치 않았지요. 당시 이탈리아의 이 경기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지는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참고로 이 앞 방어전은 동대문 야구장에서 펼쳐집니다. 역쉬 축구는 이태리, 야구는 한국! 둘 다 파란색....

 

 

 

한국 복싱의 간판으로 홍수환을 내세우는 경향이 강한데 사실 캐리어만 놓고 보면 홍수환은 김기수에게 쨉이 안 됩니다. 45? 까놓고 말해 뽀루꾸잖아요.

 

 

 

더 링이니, ‘BoxRec'이니 하는 복싱팬들의 바이블들에서 한국의 챔피언들 중 장정구 다음으로 김기수를 쳐주는 모습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17차 방어의 신화 유명우도 저 밑에 있습니다. 복싱빠들이라면 당연 빠따로 받아들일 이 사태가 어찌 성립되는지 무식한 우리 축빠들을 위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김옹께서 챔피언에 오르던 시기 프로복싱 체급은 11개였습니다. 지금은 18개고 추가된 체급은 대부분이 한국에 유리한 경량급이지요. 또 그때는 체급별로 세계 챔피언이 딱 한 명만 있었습니다. WBC가 사실상 미국 국내 기구인 WBA로부터 독립을 했다하지만 헤비급과 플라이급을 제외하곤 독자 챔피언을 뽑지 않고 있었습니다.

 

 

 

, 1966년 당시 프로복싱 세계 챔프란 타이틀을 단 인사는 겨우 10명이었고(9명이라 볼 수도 있는데, 그 설명까지 하려면 너무 길어져 생략.) 그 중 하나, 그것도 4번째로 무거운 체급의 주인공이 바로 김옹이셨으며, 엄밀히 말해 WBA-WBC 통합챔피언에 OPBF 챔피언까지 겸직하고 계셨습니다.

 

 

 

월드 메이저 복싱 기구 4, 아니 요즘은 파퀴아오, 메이웨더 배출했다고 IBO까지 쳐서 5대기구에다 온갖 듣보잡 마이너 기구들이 난립한 것도 모자라 메이저란 넘들은 한 체급에서 동시에 두, 세 명의 챔피언을 양산하며 길거리에 발로 차이는 게 세계 챔프가 되어 버린 작금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높은 자리였습니다.

 

 

 

당시 상황이 요모냥이다 보니 각 체급마다 울트라 강타자들이 득실득실합니다. 3체급 이상 제패란 슈퍼맨이 복싱을 배워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7차 방어? 차라리 발로텔리에게 응씨배 바둑을 제패시키는 쪽이 확률이 더 높습니다. 김옹 시기 챔피언 방어전이란 첫 번째만 봐주고 이후 무조건 동급 1위와의 지명전이었습니다. 80년대 한국 챔프들 지명방어전 승률... 글쎄요, 3할이나 될까요.

 

 

 

얼마 전 유명우가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지요? 장정구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근데 명예에 전당에 올라간 그 많은 다른 나라 챔프들 중 세계 타이틀서 한국 선수에게 깨져 본 양반은 딱 하나입니다. 김옹께 타이틀을 헌납한 이탈리아의 복싱 영웅 니노 벤베누티가 주인공으로 이후 미들급으로 한 체급 올려 미국의 에밀 그리피스와 라이벌전을 펼치며 대박을 냅니다.

 

 

 

이때 이탈리아에는 아마-프로 모두에서 복싱도 잘했고 명예까지 높은 니노 벤베누티에게 가려 있던 또 하나의 라이트 미들급 강타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름 한번 그레이트한 산드로 마징기였습니다. 당연히 이길 줄 알고 돈 많이 준다기에 멀리 한국까지 갔다가 김옹의 치고 잡거나 도망가는 전술에 말려 망신을 당한 벤베누티를 대신해 복수전을 계획하게 되지요.

 

 

 

벤베누티 하나 데려오는데 대통령까지 나서 나라 곳간을 탈탈 털어야했기에, 본의 아니게도 조국에 외환위기를 선사한 챔피언 김기수는 기운 센 천하장사가 거액의 대전료와 함께 내민 산시로로의 초청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벤베누티는 결국 대전료를 다 받지 못한 체 한국서 한참 개기다 그냥 돌아갑니다. 그러나 훗날, 그러니까 때는 2002. 그의 후손 축구선수들이 한국의 여러 기물을 닥치는 대로 파손하고 그냥 토꼈으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퉁친 겁니다.

 

 

 

하여간 같은 날 월드컵에선 북한에게 걷어차이질 않나... 여러 모로 이탈리아 국민들의 코리아에 대한 불쾌지수가 올라갑니다. 그들은 피의 복수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1967년의 산시로는 지금과 거의 비슷한 모양을 갖춘 상태였습니다. 사진으로 경기장 일층이 만석인 걸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최소 3만의 극악무도한 밀라노 관중이 일방적으로 마징기를 응원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축구에선 경기내용 비교할 때 홈관중 3만을 1골로 접어주곤 하지요.

 

 

 

챔피언 도전전 그리고 이후의 방어전에서 김기수의 경기력이 딱히 좋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완전 개편파 판정으로 방어에 성공하기도 합니다. 허나 이 날은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정말 잘 싸웠습니다. 2002년에 걔네들이 그랬던 것처럼 홈텃세로 진거라 졸라 들이댈 수 있었던 팽팽한 경기였습니다. KO를 함 당하긴 했지만 홈관중 3만이니 접어줘야 합니다. 그것도 그게 어디 보통 관중입니까...

 

 

 

김옹께선 199757세란 안타까운 나이에 운명하십니다. 10년만 더 사셨음 산시로 대신 상암에서 마케다 열라 두둘겨 패주실 수도 있었는데...

 

 

 

사실 저는 축구만큼이나 복싱을 좋아한답니다. 종합격투기는 예술성이 결여되었다고 봐 싫어합니다. 사이트 두목 홍차도둑님과의 감성적 차이점이죠. 산시로에서 복싱으로 이탈리아에게 복수할 날은 다시는 안 올 겁니다. 부디 언젠가 우리 축구선수들이 대업을 이뤄주길 기대하며 너무 일찍 떠나신 고인의 명복을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