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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셋풋볼

50년대 헝가리 대표팀 (1부 셰베시 구스타프)

1차대전에 이어 2차대전에서도 패전한 헝가리는 국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며 깊은 패배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절망에 젖어있던 그 땅에 마법 같은 전력을 가지고 등장한 축구대표팀은 자국민들에게는 희망을, 전세계에게는 경악을 선물합니다. 이 글은 세계 축구사의 흐름을 틀어버리며 56승 9무 6패, 4년간 32경기 연속 무패의 기록을 남기곤 어느 날 한순간에 사라진 어러니처퍼트(황금팀)에 관한 7년간의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유흥거리가 없던 시절. 스포츠 경기는 영화와 더불어 최고의 관객동원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라디오 보급률이 급속히 늘고 있었지만 40년대 말까지도 이는 헝가리 전체 가구의 60%를 넘지 못했습니다. 여러 스포츠 종목 중 특히 월드컵 준우승 등 국제적 호성적과 양 대전 사이 탄생한 많은 클럽들이 라이벌구도를 형성하며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축구는 헝가리 서민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이때 이미 등록된 프로선수가 15만에 이릅니다. 신흥 친공, 친소 권력자들은 위대한 프로레타르 스포츠인 축구의 인기 팽창이 싫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체육계에는 공산주의 혁명에 헌신했던 인사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정부가 체육부를 신설하고 각 종목별 단체를 일사분란하게 관리 하에 두는 상황에서 이들은 어렵지 않게 체육계 요직을 꿰어 찰 수 있었습니다. 국민적 정서가 반소, 반공에 있었지만 묘하게도 체육계만은 예외였던 것입니다.

 

훗날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20세기 축구 최고의 신화를 써내려갈 공산당 체육분과장 셰베시 구스타프도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축구야 말로 계급투쟁의 산물임을 역설하던 정치 선동가로 포지션 파괴라는 그의 축구 모토가 얼마나 사회주의적인지 스스로 만족해했으며, 반공 반정부측 지식인들은 이런 세베시를 조롱합니다.


 


 

셰베시는 ‘피아노의 신’ 리스트와 더불어 국제적 명성에 비해 헝가리 내에서 저평가되는 대표적 명사입니다. 그의 친공 경력은 오늘날 그를 폄하하는 유용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다른 일각에서는 정권과 대세에 순응하며 실리를 챙긴 체육계 공산주의자들을 친소 반민족 집단으로 매도함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니 우리네 과거사 문제와도 참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어쨌든 당시 헝가리는 물론 전체 유럽의 서민출신 엘리트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고 있었고, 이들은 장차 헝가리-소비에트 간 관계가 극단의 적대적 방향으로 진행되리라 전혀 예측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베시 구스타프가 구트만 벨라 등 당대 세계를 주름잡던 헝가리 출신 축구 지도자들에 비해 뛰어난 전술가가 아니었음은 확실합니다. 허나 인사와 행정에서 보여준 놀라운 수완까지 부정하긴 힘듭니다. 팀 재정은 물론 장비, 시설까지 꼼꼼히 챙기던 그는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행정형 감독으로 충분히 그 가치와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인사였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원하는 바를 잡음 없이 실현시킬 수 있는 정치적 권력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1949년 1월 10일. 헝가리 올림픽위원회 회장 자리에 있던 세베시 구스타프가 전격적으로 축구대표팀 감독에 오릅니다. 이미 48년 가을부터 대표팀에 대한 입김을 행사하지만 현안인 런던 올림픽 준비 문제로 정식 부임을 늦춰야했습니다.

 

세베시는 50여명의 선수를 순환 투입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적임자 발탁에 들어갑니다. 당시 유럽을 대표하던 센터포드론 힘의 축구를 상징하던 데아크 페렌츠를 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베시에겐 애초부터 데아크를 중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데아크의 낙마는 세베시 헝가리호의 성격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신임감독은 스피드와 체력 나아가 축구선수로서의 직업정신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선수를 싫어합니다. 데아크는 프로페셔널리즘을 혐오하던 전형적 영국식 귀족 스포츠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원초적 스포츠맨십에 신봉자였던 그를 세베시는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설상가상 데아크는 사회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습니다. 스포츠맨이기 이전에 정치인이었던 세베시는 그와 한 배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당대 유럽을 호령하던 많은 헝가리 축구 스타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제외되어나갑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던 젊은 인재들이 부름을 받으며 1949년 한해에 걸쳐 서서히 세대교체가 이뤄져 나갔습니다.

 

 

공수의 에이스로 한국에선 흔히 ‘푸스카스’라 부르는 푸슈카시 페렌치와 헝가리 내에서 만큼은 푸슈카시 이상의 인기를 보유한 ‘헝가리의 홍명보’ 보직 요제프로 결정됩니다. 공격진영 양 사이드는 부더이 라슬로와 치보르 졸탄이 맡았고 중앙 수비에 로란트가 보강됩니다. 노련함을 더한다는 명목으로 보강된 이 로란트가 당시 겨우 23살에 불과했고 나머지들은 아직 10대 소년들이었습니다.

 

진정한 셰베시 헝가리호의 완성은 MTK 소속 공격수였던 히데그쿠티가 합류한 1949년 11월 20일 스웨덴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송곳패스와 슈팅력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점이 없던 선수인데다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로 은퇴 뒤 지도자로서도 명성을 날리며 유럽에서 가장 비싼 감독이 될 그를 우리는 인류 최초의 셰도우 스트라이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고공 폭격기 코치시 샨도르까지 더해지며 비운의 에이스 데아크 페렌츠는 대표팀에서 영원히 제외됩니다.

 

체코 프라하에서 벌어진 49년 4월 10일 세베시 헝가리호의 데뷔전. 어이없게도 헝가리는 2-5로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전임 걸로비치 티보르 감독의 멤버들이 그대로 출전한 상태에서 세베시 신임감독은 아무런 지시 없이 경기를 구경만 합니다. 그간 세베시의 대표팀 전력강화 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헝가리 국민들이었기에 결과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뒤 이어진 당대 세계 최강 오스트리아와의 일전. 드디어 ‘세베시의 아이들’이 전격 실전 투입됩니다. 결과는 6-1 압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