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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의 거인들

유럽 지역예선 잔혹사 -1


필자: Yan11


축구 대륙 유럽의 국가들은 2년 주기로 환호와 탄성이 교차한다. 유로 2008 예선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2010 월드컵 지역예선 대진표가 발표되어 이미 유럽팀들은 또 다른 승부에 대비한 전략 구상에 골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지만, '본선 대회 상위 입상보다 어렵다는' 유럽 지역 예선전은 역사상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겨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통 강호들과 신흥 강호들, 복병들이 뜨고 지고를 반복해왔다. 유럽 지역 예선전에서 아쉽게 퇴장해야 했던 팀들을 살펴본다. 

* 비운의 유럽 챔피언, 덴마크 

1992년, 덴마크의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은 단순히 축구계뿐 아니라, 전 유럽의 그해 10대 뉴스로 선정될 만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혹자들은 그해 6월, 덴마크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통합의 핵심 단계였던 마스트리히트 조약 비준을 부결시킨 것과 더불어 '덴마크가 유럽을 두 번 놀라게 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덴마크는 대회 개막 1주일 전에야 UN과 FIFA의 징계를 받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출전권을 넘겨받았을 정도로, 출전 자체도 극적이었지만 잉글랜드,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등 당대의 유럽 열강들의 벽을 차례로 타고 넘으며 결국 우승컵까지 거머쥐어 당시까지 유럽 축구 사상 최대 이변의 주인공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면서도, 덴마크는 이 대회를 전후한 1990년과 199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참담한 심정을 감내해야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주어진 유럽 쿼터는 주최국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13장이었다. 지역예선 출전팀은 총 32팀으로, 7개조로 나뉘어 경합을 벌였는데, 각 조 1위와 5팀으로 구성된 4개조의 2위는 자동적으로 본선 티켓을 가져가고, 4팀으로 구성된 1,2,4조의 2위 중 상위 두 팀이 역시 본선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덴마크는 루마니아, 그리스, 불가리아와 함께 1조에 편성되어 있었다. 초반부터 순항하며 86년 대회에 이어 2회 연속 본선행이 유력하던 덴마크는 1989년 10월 11일, 코펜하겐에서 가진 라이벌 루마니아와의 홈경기에서 3-0으로 완승, 3승 2무를 기록해 조 1위로 뛰어올랐다. 

남은 경기는 11월 15일의 루마니아 원정. 덴마크는 이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전반 6분 만에 신예 스트라이커 플레밍 포블센이 선취골을 뽑아내자 덴마크의 본선 진출은 거의 유력해 보였다. 그런데 게오르게 하지와 마리우스 라카투슈, 가브릴 발린트의 3각 편대를 앞세운 홈팀 루마니아의 공세는 전반 중반 이후 거세져, 발린트와 요안 사바우가 연속골을 작렬하며 전세를 뒤집었고, 후반 발린트의 추가골까지 더해져 순식간에 3-1의 스코어로 이어졌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후반 16분, 하지가 퇴장당하면서 덴마크에게 마지막 기회가 왔는데, 불행히도 30여 분간 덴마크는 루마니아 문전을 위협했지만 끝내 골을 얻지 못해 1-3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루마니아가 4승 1무 1패, 승점 9점으로 1위를 차지했고 덴마크는 8점으로 2위에 올랐지만, 2조 2위 잉글랜드와 4조 2위 서독이 나란히 3승 3무(승점 9)를 기록하는 바람에 유럽 예선 조 2위 중 유일하게 탈락하는 불운에 치를 떨게 된다. 

4년 뒤인 1994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유럽 챔피언의 보위에 올라 있던 덴마크는 스페인, 아일랜드와 3조에서 경합을 벌였다. 당시엔 덴마크에 대한 상대팀들의 집중견제가 가해지던 때여서, 덴마크는 라트비아, 알바니아 같은 약체들과의 대전에서도 크게 고전해야 했다. 그럼에도, 덴마크는 라이벌 스페인을 1-0으로 격파하는 등 착실히 승점을 쌓아나갔고, 리투아니아와의 10차전을 앞두고는 리차드 묄러-닐센 감독과의 불화로 대표팀을 떠났던 수퍼 스타 미카엘 라우드럽까지 복귀해 티켓 굳히기에 들어갔다. 스페인과의 예선 최종전 원정 경기를 남겼을 때까지의 덴마크는 7승 4무, 승점 18점으로 3조 1위를 지키고 있었다. 

스페인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조 1위로 본선에 오를 수 있었던 상황. 전반 10분경, 미카엘 라우드럽이 맞은 1대 1 찬스에서 스페인 GK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라우드럽에게 범한 반칙으로 퇴장당하면서 덴마크는 수적 우세까지 점하게 되었다. 스페인 역시 패하면 곧바로 탈락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무승부를 염두에 둔 탓인지 덴마크는 쉽사리 골을 뽑아내지 못했고, 결국 후반 19분 스페인의 이에로가 천금 같은 골을 뽑아내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덴마크는 세찬 공격을 퍼부었지만 긴급 투입된 GK 카니사레스가 눈부신 선방을 펼치며 결국 한 골을 마지막까지 지켜내, 덴마크는 지역예선 첫 패배를 당했다. 동시에 진행된 경기에서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와 1-1로 비겨 덴마크와 7승 4무 1패로 동률을 이뤘는데, 골득실(+13)까지 같아 다득점 집계까지 해야 했다. 덴마크는 지역예선 12경기에서 단 2골만을 허용했지만 득점이 15점에 불과, 아일랜드(19득점 6실점)에 다득점에서 밀려 일순간에 조 3위로 추락, 또다시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덴마크는 수비가 강한 팀이 장기 레이스의 승점 관리에 유리하다는 속설마저 무색한 결과를 얻었다.

덴마크의 좌절이 아쉬운 이유는 두 번 모두 비기기만 해도 되는 최종전에서, 그것도 수적 우세를 점한 상태에서 당한 패배로 인해 본선 티켓을 놓쳤다는 점이다. 또한 최종전까지 무패로 조 1위를 달리고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두 번의 실패를 거울삼은(?) 덴마크는 1998년 대회 지역예선 최종전에서는 그리스와 0-0으로 비겨 결국 조 1위를 지켜냈다. 



* 프랑스 축구사상 최악의 날, 1993년 11월 17일. 


(93년 11월 17일 프랑스-불가리아전의 불가리아 TV 실황중 코스타디노프의 결승골 장면)


덴마크가 세비야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그 시각, 파리에서는 프랑스가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1986년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급격한 부진에 빠진 프랑스 축구는 유로 88과 90월드컵 본선 진출에 연속 실패했지만 유로 92 예선전에서 8전 전승을 기록하며 본선 대회에 모습을 드러냈고, 94월드컵 예선전에서도 에릭 캉토나, 장-피에르 파팽 등 특급 공격수들을 앞세워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총 10경기 중 8차전까지 마쳤을 당시의 프랑스는 6승 1무 1패로 6조 단독 1위에 올라 있었다. 남은 두 경기에서 승점 1점만 얻어도 최소 조 2위로 본선행이 결정되는 상황. 게다가 두 경기 모두 홈경기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본선행은 99% 이상 확실한 듯 보였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의 본선 진출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역시 최종 2차례의 홈경기를 모두 파리에서 개최, 대관중 앞에서 축구강국으로의 부활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13일 파리에서 가진 약체 이스라엘과의 경기에서 프랑스는 본선행을 확정할 태세였다. 과거 차기 한국 대표팀의 유력한 사령탑 후보이기도 했던한 제라르 울리에 감독은 주장 파팽을 비롯하여 캉토나와 다비 지뇰라, 블랑, 프티, 데샹 등 정예 멤버들을 총동원한 가운데 홈팬들 앞에서 본선 티켓 획득을 자축하려 했다. 전반 21분 만에 로넨 하라지에게 일격을 당했지만 곧이어 프랑크 수제와 지뇰라가 연속골을 터뜨리며 2-1로 전세를 뒤집어, 프랑스팬들은 이미 축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 수 아래 이스라엘을 상대로 너무 방심한 탓이었는지, 후반 막판 들어 프랑스는 전열이 급격히 흐트러지며 38분경 에얄 베르코비치에게 동점골을 허용한 데 이어 추가시간에 로이벤 아타르에게 충격적인 역전골을 허용, 2-3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 경기는 이스라엘이 94월드컵 예선전에서 얻은 유일한 승리였다. 이스라엘은 당시 1승 3무 6패로 6조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스라엘전 패배가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본선 진출 가능성은 여전히 컸다. 11월 17일, 파리에서 4만 8천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불가리아와의 최종전에서 전반 32분 만에 캉토나가 선취골을 잡아내며 또다시 전 프랑스를 달아오르게 했다. 5분 만에 에밀 코스타디노프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후반 막판까지 1-1의 스코어가 이어지며 프랑스는 우여곡절 끝에 본선행에 성공하는 듯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레슬리 모트람 주심이 시계를 들여다보던 후반 45분, 중앙선 부근에서 류보슬라프 페네프가 전방으로 침투하던 코스타디노프에게 왼발 로빙 패스를 찔러 넣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디디에 데샹이 따라붙었지만 페널티 지역으로 접어들자마자 발이 미끄러지며 놓쳐버렸고, 사각에서 찬스를 맞은 코스타디노프의 앞을 로랑 블랑이 태클로 가로막았지만 코스타디노프의 슈팅이 한 찰나 빨라, 공은 크로스바를 맞고 프랑스 골문으로 빨려들어갔다. 

필자는 후일 TV 불가리아에서 특집 편성한 이 경기의 중계 실황을 인터넷을 통해 구해볼 수 있었는데, 페네프의 패스부터 종료 휘슬이 울리기까지, 불가리아 선수들의 골 세리모니를 포함하고도 불과 1분 20초밖엔 걸리지 않았다. 이 경기는 유럽 지역 예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로 꼽히며, 후폭풍도 상당했다. 46세의 촉망받는 지도자였던 울리에는 취임 1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하여 앰므 자케 코치가 뒤를 지었으며, 당시 프랑스 축구연맹의 장 푸르네-파야르 회장마저 사퇴하는 등 프랑스 축구계가 일대 혼란과 비탄에 빠졌었다. 훌리에 감독은 이후 프랑스 청소년 대표(20세 이하)를 거쳐 올랭피크 리용에서 재기하기까지 10여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 본문은 필자가 2007년 11월 29일 축구공화국 재직 시절 쓴 글을 보완 편집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