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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의 거인들

무너진 바르셀로나...축구계 판도 변화의 서막



글쓴이: Yan11




 바르셀로나가 무너졌다. 25일 새벽 홈인 캄프 노우에서 펼쳐진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바르셀로나는 첼시와 2-2로 비겨 종합전적 1무 1패로 탈락, 대회 사상 최초의 2연패 꿈을 접었다.




 역사상 최강 클럽이라는 평가까지 받던 바르셀로나가 이번 시즌 리그에 이어 챔피언스 리그까지 놓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첼시전은 단순한 패배를 넘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던 최근 4,5년간의 유럽 클럽 축구 판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경기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주지하듯, 최강 바르셀로나의 시초는 아이러니하게도 2008-09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후반 추가시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극적인 동점골로 첼시를 무너뜨리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세를 몰아 그들은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했고, 지난 시즌에도 역시 맨유를 완파하고 또다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호셉 과르디올라가 부임한 2008년 이후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 리그 우승 3회, 국왕컵 1회, UEFA 수퍼컵 2회, 스페인 수퍼컵 3회, 클럽 월드컵 2회 등 단 4년간 기록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성과를 내면서 세계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 이것은 수퍼 스타 리오넬 메씨의 존재와 팀내 유소년 출신 선수 위주의 등용으로 조직력을 극대화한 점, 짧은 패스를 바탕으로 한 점유율 축구의 가시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기간 바르셀로나의 강점은 압도적인 패스 성공률에 기초해 경기당 최소 65% 이상으로 상대팀보다 두배 가량 높은 점유율을 바탕으로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여기에 메씨와 챠비를 비롯해 전성기를 맞이한 우수한 개인기량을 갖춘 중심 공격수들의 활약이 컸다. 이 과정에서 바르셀로나 멤버들이 주축이 된 스페인 대표팀이 2010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장기간 FIFA 랭킹 1위를 유지하면서 이들의 축구는 전세계가 본받아야할 표본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세상의 이치. 4년간 거의 플랜B 없이 자신들만의 축구를 구사해왔던 이들에게도 변화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기본적으로 바르셀로나는 수비가 강한 팀이 아니다. 카를레스 푸욜과 헤라르드 피케라는 세계 정상급 센터백 콤비를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두선수 모두 스피드에 취약하고 공격 가담후 백코트가 늦는 단점이 있다. 이를 위해 수비형 미드필더인 부스케츠와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수시로 최후방까지 내려와 공백을 메우는 전형을 고수해왔다. 수비가 약하다 보니 최대한 수비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실점을 막는 데 유용하다.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축구계 속설이 증명하듯, 바르셀로나는 약한 수비로도 세계 정상의 팀이 될 수 있음을 실현시켰지만, 결국 그 수비 약점이 중요한 순간 팀의 발목을 종종 잡아왔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한국 대표팀도 본질적으로 수비에 문제를 안고 있던 터라 전방에서부터의 강한 압박으로 위험지역에서의 수비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전략으로 성공을 거둔 바 있지만 그것이 결국 고질적인 수비 불안을 해결하지는 못했음을 상기한다.




바르셀로나의 점유율 축구는 90분간의 스코어로 승자를 결정한다는, 즉 시간이 제한된 경기라는 축구의 특성에 기인한다. 우세한 볼점유율을 바탕으로 공격을 펼쳐 골을 얻어내고, 효과적이든 효과적이지 않든 계속해서 공격 지역에서 공을 가짐으로써 수비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주심의 종료휘슬을 맞이한다는, 대단히 간단한 전략이다. 바르셀로나는 높은 패스 성공률을 자랑하지만 실제로 골과 직결되는 패스는 수백개의 성공된 패스들 중 열손가락으로 충분히 꼽을만큼이다. 반면, 지난 4년간 바르셀로나는 경기중 몇차례 찾아오지 않는 위기에서는 거의 대부분 실점했다. 첼시와의 1차전에서 상대의 단 한개 유효슈팅에 결승골을 내준 것이나,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 아스날과의 2차전에서 유효슈팅 자체를 주지 않고도 자책골로 동점골을 허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점유율 축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체력이다. 지난 네시즌 동안 바르셀로나는 공히 시즌중 체력 사이클이 하향세로 접어드는 10,11월과 2,3월에 위기를 맞이했다. 다른 명문팀들에 비해 선수층이 얇고, 주전과 비주전의 기량차가 크다 보니 베스트 11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서 이들의 컨디션 여하에 따라 예술적인 축구를 보이기도, 졸전을 벌이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지만, 지난 4년간 시즌 평균 60 경기 이상씩을 소화했음을 감안하면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체력은 세계 최정상급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바르셀로나는 점유율 축구의 특성상 경기당 체력소모도 타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난주의 첼시-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오늘 새벽의 첼시전까지 3연전에서 바르셀로나는 1무 2패를 기록했다. 이번 시즌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세경기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하면서 바르셀로나는 황금기 시작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바르셀로나의 점유율 축구 자체가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바르셀로나의 득점 형태는 매우 단순하다. 공격수들이 포지션의 구분 없이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으로 돌아들어가는 선수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하는 것이 요지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의 공간 창출은 축구가 경기장 면적이 제한된 경기라는 특성 때문에 한계를 갖고 있다. 상대가 수비라인을 최대한 끌어내려 골문과 수비라인 사이의 공간을 거의 없게 해버리면 바르셀로나 공격수들이 활동할 여지가 사라져버린다. 2009년에 바르셀로나를 격파했던 인터밀란이나, 이번 시즌의 첼시는 철저히 이러한 안티풋볼을 구사했다. 결정적 슈팅 찬스만 주지 않는다면 바르셀로나 공격수들의 페널티 지역 근방까지의 진출을 거리낌 없이 허가했다. 다만 수비수들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패스가 빠져나갈 길을 차단하거나, 최소한 패스가 의도대로 정확히 연결되지 못하도록 했다. 바르셀로나는 수치상의 패스성공률은 높았지만 결정적 지역에서는 거의 유익한 패스 연결을 이뤄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바르셀로나는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얻어내지 못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이런 상황이 고착화되어 매우 고전하는 약점이 있었다. 




야구에서 스몰볼과 빅볼이 있듯, 축구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상반된 전략이 존재한다. 바르셀로나가 추구하는 컴팩트 사커가 통하지 않을 경우에 롱패스와 공중전 위주의 단순한 축구로 넘어가는 것이 축구의 기본이다. 축구의 목적은 오직 하나, 골을 넣어 이기는 것이지 어떻게 골을 넣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자신들의 축구가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2단계 전략이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단신들로 구성된 탓에 공중전과 세트 플레이에 취약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데려왔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결국 바르셀로나식 축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시즌만에 팀을 떠나야 했다. 필자는 몇년전부터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바르셀로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장신 공격수를 영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자주 피력했는데, 정상의 팀이라면 자신들의 축구 외에도, 이런 저런 축구를 다 할 줄은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공중전에 취약하다 보니 그간 얻었던 수많은 코너킥과 프리킥의 세트플레이 찬스를 모두 무위로 돌리는, 어찌보면 대단히 비경제적인 축구를 해왔던 것도 바르셀로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골은 예술적으로 어렵게 넣고, 실점은 세트플레이나 공중전, 속공으로 쉽게 허용했던 것이 바르셀로나 축구였다-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어쨌든, 오늘 경기로 인해 지난 4년간 유럽뿐 아니라 세계 축구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바르셀로나의 위상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바르셀로나 팬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지만, 이로 인해 유럽 축구계의 판도가 다강 체제로 돌아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르디올라가 다음 시즌에도 팀을 이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와는 별개로 바르셀로나는 이제 멋지게 이기는 것 이상으로 쉽게 이기는 방법에 대해 골몰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