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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보완계획48

이에나가 아키히로가 울산의 아키가 되기까지



등번호 28, 아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검빨의 위압감이 지배하는 스틸야드에서 한글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는 이에나가 아키히로, 아니 아키라니. 매점에서 어렵게 획득한 육개장 사발면이 반 쯤 남아 있었음에도 젓가락질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본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는 아키의 플레이를 단 한 순간도 놓치기 싫은 마음이었다


감바 오사카 유스가 배출한 최고의 걸작


지금으로부터 8년 전, 19살의 아키는 감바 오사카 유스가 배출한 최고의 걸작이란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당시 혼다 케이스케도 감바 유스에서 활약하고 있었지만 아키의 존재감에 가려졌을 정도로 아키의 잠재력은 일본 최고수준이라 평가받았다.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난 얄궂은 운명의 두 선수는 치열한 라이벌 의식으로 인해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켰다. 심지어 유스팀 라커룸이 아키와 혼다의 '맞짱용' 경기장으로 쓰여질 정도였다. 하지만 혼다는 끝내 아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감바의 선택은 아키였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혼다는 그 길로 감바를 떠나게 된다.


아키의 J리그 데뷔전은 충격적이었다. 유스팀 소속이던 아키는 2004년 4월 26일 알비렉스 니가타와의 원정 경기에서 J리그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후반 교체를 예상했지만 니시노 아키라 감독의 선택은 선발이었다. 그리고 등번호 28번 아키는 경기 시작 9분 만에 엄청난 중거리 슈팅으로 J리그 데뷔 골을 터뜨렸다. 원정 응원에 나선 감바 서포터들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타이밍에 터진 골이었다. 감바 프론트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프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아키의 출전 시간은 짧아져만 갔다. 감바가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2005시즌의 활약은 나쁘지 않았다. 선발과 주전을 오가며 과감한 드리블에 이은 돌파와 패싱 센스로 기대를 충족시키는 활약을 펼쳤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엔도 야스히토, 묘진 토모카즈 등이 버티는 감바 미드필드진은 빈틈이 없는 탄탄한 구성을 자랑했고 그 속에서 아키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플레이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좌절의 시간들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 아키 길들이기에 나섰지만 아키는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를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등번호를 8번으로 변경한 2007시즌에는 리그에서 선발 출전이 고작 6경기에 그쳤다. 불만이 폭발한 아키는 니시노 아키라 감독과의 면담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와 팀이 원하는 플레이에 확실한 온도차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다음 시즌을 앞두고 오이타 트리니타로 임대를 떠난다.


2008시즌 아키의 목표는 오이타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다음 그간 주역으로 활약했던 올림픽 대표팀 소속으로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틀어지고 말았다. 오이타 훈련캠프에 합류하자마자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었다. 6개월 뒤 복귀를 목표로 도쿄에서 재활에 매진했지만 100%의 몸을 만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기대했던 올림픽 출전도 좌절되었고 오이타에서의 첫 시즌은 4경기 출전이 전부였다.


이 시기에 아키는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오이타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아키를 위해서 매 경기마다 아키의 유니폼을 벤치에 걸어 두었다. 비록 아키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하지만 오이타는 아키와 함께 하는 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재활훈련 지원에도 아낌이 없었다. 오이타는 도쿄에서 재활 중인 아키의 몸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하루라도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팀의 프렌차이즈 스타도 아닌 그저 임대 신분에 불과한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오이타를 보며 아키는 축구선수로써의 멘탈리티를 바로 잡게 된다.


묵혀둔 재능이 폭발하다


오이타와 1년 임대 연장에 합의한 아키는 완벽하진 않지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팀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생소한 포지션인 윙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번갈아 맡아야만 했다. 급격하게 붕괴된 팀 밸런스는 결국 강등으로 이어졌지만 부상 복귀 후 첫 시즌에 30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부상 후유증을 완벽하게 극복한 점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아키의 화려한 부활은 세레소 오사카 임대로 이뤄졌다. 전반기에 카가와 신지가 도르트문트로 이적을 결정하면서 세레소의 전력 약화가 우려되었지만 아키의 맹활약이 모든 우려를 잠식시켰다. 장점인 드리블 돌파는 여전했고 오이타에서의 경험을 살려 경기의 완급조절까지 훌륭하게 해냈다. 팀 공격의 주축인 이누이 타카시, 키요타케 히로시와의 호흡도 살아난 덕분에 세레소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아키의 부활에 언론이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오카다 다케시 전 일본 대표팀 감독은 "이에나가는 대단한 잠재력과 놀라운 기술은 가진 선수이다. 1:1 상황에서 자신 있게 승부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일본인 선수이기도 하다. 비슷한 케이스로 카가와 신지나 미야이치 료가 있지만 최고를 꼽자면 단연 이에나가이다"라며 아키의 공격적인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AKI-14에서 '아키-28'의 시대로


세레소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아키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미드필드 전 지역을 소화하는 아키의 다재다능한 면모는 마요르카와의 4년 계약을 가능케 했다. 리가 22라운드 오사수나전에서 교체 출전에 나선 이후 공격형 미드필더와 측면 미드필더를 오가며 14경기에 출전했다. 4월에는 세비야와 헤타페를 상대로 헤딩으로만 2골을 기록하며 미카엘 라우드롭 감독의 신뢰에 보답했다. 4년 만의 일본 대표팀 복귀는 보너스였다.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은 제 2의 옵션으로 준비 중이던 3-4-3 시스템의 정착을 위해 아키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러나 문제는 비교적 일찍 찾아왔다. 미카엘 라우드롭 감독이 경영진과의 불화로 마요르카 감독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마요르카는 젊은 재능의 발굴에 일가견이 있던 호아킨 카파로스 감독 체제로 전환했다. 더불어 지난 시즌에는 경합에 가까웠던 곤살로 카스트로와의 포지션 경쟁에서도 밀리면서 아키는 마요르카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몸과 감각이 벤치에서 둔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호아킨 카파로스 감독의 계획에서 제외된 것을 알게 되면서 아키는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 브라질 월드컵 출전을 향한 꿈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도전의식이었다. 또한 십자인대 파열로 누워있는 동안 자신이 축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아가 그라운드에서 뛰어야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키의 선택은 놀라웠다. 분데스리가 클럽의 유혹은 물론이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J리그 클럽의 복귀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K리그를 선택한 것이다. 아키가 K리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보다 엄격한 환경과 시선이 존재하는 K리그에서 뛰며 한 인간으로써, 그리고 축구선수로써 성장하길 원했다. AK-14에서 아키-28로의 변화는 강한 도전의식과 함께 실패와 부활을 거치며 성숙된 멘탈리티에서 시작된 것이다.


프로무대에서 처음으로 부여받았던 28번으로 울산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아키는 포항과의 리그 개막전에서 교체로 출전하여 특유의 드리블 돌파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좌우 측면을 가리지 않았고 1:1 대결에서 발휘되는 테크니션의 기질도 돋보였다. 결과는 울산의 1-0 승리. 경기 후 김호곤 감독에게 아키의 적응도와 향후 기용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김호곤 감독은 "아키의 활약에 만족한다. 한국 축구에 대한 적응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앞으로 출전시간을 늘려갈 예정"이라며 아키의 빠른 적응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울산 팬들도 아키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인 용병 이에나가 아키히로가 아닌 울산의 28번 아키. 강한 도전의식과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그의 활약을 보는 것만으로 2012년의 K리그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Text by 배정훈 / Photo by 울산 공식 홈페이지  

감수 낑깡대부, 칼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