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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아시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는 누구일까?

글쓴이 : 홍차도둑




"플레이메이커"
플레이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뭔가 묘한 매력과 함께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단어다.

현대축구에 있어 플레이메이커의 비중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많은 팬들은 '환타지스타'라던가 기타 여러 말로 '판타스틱'한 플레이를 바라면서 패스 한방, 움직임 한번에 팀의 운명을 바꾸는 '플레이메이커'라는 존재를 축구장에서 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를 본다면 '위대한 플레이메이커들의 시대'라고 정의할만한 시대다. 이 시대의 수많은 위대한 플레이메이커들이 위대한 축구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플레이메이커가 사라진 시대'의 단초를 열었다.

변방이라 불리던 아프리카도 걸출한 플레이메이커인 'Jay Jay'오코챠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아시아에는 과연 세계무대에 자랑할만한 플레이메이커가 없었을까?


개인적으로 선정한 분은 이분, 이 사진의 공식적인 설명은 이렇다
The USSR captain,
M. Kasymov,
proudly holds up the JVC Cup he has
just received. Sharing his joy are
(l . tor.) : H. H. Cavan, FIFA's President
Dr Joäo Havelange, andM. Kai (JVC
Canada).
Le capitai

그렇다...소련의 주장을 하신 분...
카시모프. 난 주저없이 이 사람을 아시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꼽는다.
아시아 사람으로선 몇 안되는 세계대회 우승 커리어를 가진 분이다.(1987년 17세 월드컵, 이 멤버는 1988 18세 이하 유럽청소년 대회도 쓸어버린다)

소비에트 축구대표팀의 별명은 '스보르나야'라고 한다. 러시아어인데 번역을 한다면 '컬렉션'에 가까운 뜻인데 각 공화국에서 최고의 인재들만 모았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다. 다른 종목의 대표팀도 그런 애칭을 붙일만 한데 유독 소련 대표팀만 이 애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스보르나야'는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우크라이나 계열이 중심을 이루었고 중앙아시아쪽은 거의 찬밥 신세였다.

그렇다. 이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시다.
1994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이 패배할 때 우즈벡의 중원을 지위하기도 했다.

사실 그가 한국과 맞딱뜨린 경기에서도 보면 한국이 1997년 우즈벡 원정경기에서 5-1로 대승했지만 사실상 그날 홍명보와 유상철의 수비는 낙제점에 가까왔다. 우즈벡의 키 플레이어로 꼽힌 카시모프를 마크하는데 완전 실패했다. 이날 한국의 대승은 전형적인 카운터 어텍의 승리였다. 우즈벡은 한국에게 완전히 측면을 내주었고, 전혀 견제하지도 못했다. 
만약 비행기를 놓쳐서 경기에 참가하지 못한 쉬크비린이 우즈벡의 공격에 박혀있었다면 경기 내용은 몰랐다. 쉬크비린의 묵직한 포스트플레이와 수비를 끌고다니는 능력은 잠실에서 벌어진 한국의 홈경기에서 종료 직전 이상윤의 결승골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을 무섭게 위협했었기 때문이다.

이날 카시모프의 압권인 플레이는 홍명보-유상철이라는 두명을 유유히 내제낀 거였다.
유상철과 홍명보가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유려한 드리블로 측면으로 나가서 올리는 크로스, 마크를 받으면서도 중원에서 최 전방의 샤츠키흐에게 연결시키는 타이밍 패스 등은 한국 수비를 상당히 뒤흔들었다. 문제는 이날 경기에서 샤츠키흐는 최전방에 혼자 남겨져서 밀착마크에 철저히 봉쇄당했다. 그래서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대패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는 잘 남아있지 않은 경기지만 그의 뛰어난 기량이 발휘된 경기 중 하나로 꼽을만한 경기였다.

그의 기량이나 기타 커리어로 볼 땐 아시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놓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2002 월드컵 예선때엔 그는 팀내 최다득점자로 떠오르며 팀을 최종 예선에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본선 진출을 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당시 우즈벡 축구의 한계였다.
그래서 카시모프는 소비에트 이후에는 1994 아시안 게임 외엔 대외적인 커리어가 별로 없다.

하지만 기량만으론 아시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놓기엔 부족함은 없는 선수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아시아권에서 보여준 몇 안되는 활약, 그것도 한국에 중계된 경기는 얼마 없지만 그의 왼발은 가히 마술사 급이었다.
청소년 대회에서의 맹활약을 기반으로 그는 소련 청소년 대표팀의 등번호 10번을 달아버린다. 거기에 주장 완장까지...대단한 선수였던 것이다. 성인팀에서의 활약도 대단했다.

러시아 리그에서 카시모프는 한 이름 한 선수다. 한때 '우승청부사'로 불리기도 했었다.
사실 1998 월드컵 예선에서 이 선수의 활약이 좀 들쭉날쭉하다.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한국-일본과의 원정경기엔 아예 참가도 못했다.
우승레이스에서 승점이 목마른소속팀에서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5년의 러시아리그에서는 그 전까지 계속 리그를 제패하던 모스크바 스파르타크팀을 제치고 알라니아 블라디카프카스 팀이 러시아리그의 우승자로 기록된다.
알라니아 블라디카프카스팀이 스파르타크를 이기기 위해 전격적으로 끌어들인 선수가 바로 카시모프였다.
우승청부사 바로 그 자체였다.

그 뒤 카시모프는 조국으로 돌아와 1년간 있으면서 파흐타코르에서 22득점을 하며 득점왕을 차지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는 등 '우승을 위한 필수요소'가 된다. 당시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축구리그에서의 '믿고 쓰는 우승청부사'였던 거다.

[인민체육훈장을 수여식의 카시모프, 그의 은퇴식날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직접 수여한 훈장이다.
소련시대에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던 우즈벡의 영웅. 소련 최고리그를 뒤흔든 선수의 은퇴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사진출처 : http://gov.uz/uz/press/sport/8140 ]


카시모프는 이후 은퇴 뒤 지도자로 활동하며 우즈벡의 대표팀 코치, 올림픽 팀 감독을 역임하며 현재는 우즈베키스탄 최강의 클럽으로 일컬어지는 분뇨드코르 팀의 감독으로 현재 재직중이다.
그의 은퇴때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인민체육훈장을 수여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카시모프를 앞서는 대선배가 계시다.
아시아 출신 선수로 유럽을 쓸어버린 축구영웅.
그는 고려인.
미하일 안.


미하일 안의 사진. 까레이스키라는게 확실히 보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비행기사고로 일찍 타계했다.



소련은 1976년 23세 이하 유럽선수권을 우승했다.  위의 사진은 그 때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사진이다.
왼팔의 저 띠가 보이는가? 그렇다 그는 그 팀의 주장이었다.
당시 23세 이하 유럽선수권은 서열로 따지자면 유럽챔피언컵 바로 밑이었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올림픽이 23세 이하가 출전하는 것이다.

아시아 지역의 선수에게 저렇게 주장 완장을 주는건 소련 대표팀 역사상 예가 얼마 없다. 모든 구기종목을 통털어서 말이다.
더구나 A매치 최정예팀 바로 밑의 팀의 대표선수에 주전도 모잘라서 주장까지 맡았다면...미하일 안의 실력을 대강이라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는 귀한 사진들, 대부분 http://www.tashkentpamyat.ru/an-mikhail-ivanovich-futbolistkapitan-fk-pakhtakor-.html 에서 가져왔다. 그를 추모하는 페이지다. ]



당시 포지션 분류로는 하프백 으로 불렸다. 당시 하프 백 이라면 지금의 볼란치와 거의 비슷한데 중원미들을 장악하는 플레이메이커에 가깝다고 볼수도 있다.
소련의 축구전문가들이 대놓고 '블로힌과 미하일 안의 시대가 될 것이다' 라고 한데에는 1974시즌의 기록도 크다.
그해엔 블로힌(당시 22세)이 20골로 소련리그 득점왕이 되었을 때 21세의 미하일 안은 11득점을 기록했다.
미하일 안은 득점랭킹 공동 6위였다.그것도 하프 백이라는 포지션의 선수가!

현재의 K리그로 옮겨놓는다면 김정우 선수나 김상식 선수가 득점랭킹 공동 6위를 했다는 소리와 비슷하다.
그것도 김정우 선수가 상무로 뛰면서 득점랭킹 선두권인것과는 달리 중원 미드필더가 득점레이스에 뛰어들 정도의 골을 기록했다는 거다. 득점력을 가진 선수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후 그는 대표선수로 뽑히는 등 승승장구하고 거기에 주장완장까지 차버렸다.
그때나 그 이후나 소련 축구대표팀을 장악한 것은 유럽 출신 선수들이었다. 아시아 출신의 축구선수가 드물던 아니 뽑히더라도 잘 살펴보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계가 '중앙아시아에 살았다'는 것 정도일 뿐 순수한 중앙아시아계의 선수가 선발되고, 주전까지 되었으면서, 주장까지 맡은 것은 소련 축구 역사에 있어서 분명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역사를 써내려간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기대를 그는 이루지 못했다.

1979년 8월 11일 미하일 안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뮌헨 참사'와 비견될, 아니 능가하는 사고였다.


[ 타슈켄트에 있는 당시 비행기 사고를 추모하는 추모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겪은 뮌헨 참사보다 더한 사고였다. 생존자 0. 미하일 안을 비롯한 선수단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사고에 대한 페이지는 http://www.fergananews.com/article.php?id=3078 당시 선수단 전원의 명단이 소개된 사고 25주년 기사다. 미하일 안은 두번째로 소개된다. 감독 바로 다음. 미하일 안은 당시 파흐타코르팀의 주장이었다. ]



미하일 안은 이 사고로 타계했다. 불과 26세의 젊은 나이에 그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지도 못한 채.


[타슈켄트에 있는 미하일 안의 묘지. 그를 추모하는 등불이 켜져 있다. 사진출처는 http://sport-necropol.narod.ru/an.html ]

미하일 안의 공식기록은 다음과 같다.

A매치 기록은 2경기 출장 득점 없음
파흐타코르에서는 10년간 233경기에 출장 50골을 기록.
소련 23세 이하 대표팀의 주장, 당시 팀은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을 함
하프 백이면서 3시즌, 파흐타코르 팀의 최다 득점자
소련 내 순수 아시아계로서는 최초의 소련 대표.
(미하일 안에 앞서 우즈벡의 유리 프세니츠코프와 겐나디 크리나츠키가  대표로 뽑힌바 있지만 둘은 러시아계다.)

그의 짧은 생애에서 '커리어 하이'를 꼽으라면 1974년, 1975년 구 소련 1부리그의 활약을 꼽아야 한다.
1974시즌에는 1부리그에서 29경기에서 11득점, 1975엔 27경기 8득점이라는 상당히 높은 득점을 기록했다.
당시는 우즈벡 리그가 독립되서 있는 리그가 아니었다.
당당히 유럽 최고의 리그중 하나로 불리는 구 소련의 1부리그 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디나모 키에프가 유럽 챔피언스 컵 먹고 그러던 때다.
소련이 세계축구와 유럽 클럽의 강호 자리를 떵떵거리던 때 저 기록이면...거의 차범근급이다.

분명 유럽 축구에 있어서 한 점을 찍은 차범근, 박지성보다 앞선 선수. 다만 당시 국적이 '소련'으로 되어 있고 아시아쪽으로는 한번도 뛴 적이 없기에 '아시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꼽기엔 무리가 따르기에 본 포스팅에선 카시모프를 우선으로 했음을 밝힌다.

언젠가 더 찾아서 써야 할 부분이긴 하고, 누구 말 마따나 '요절했기에 좋은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그는 한 획을 그은 아시아계 선수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작은 자료밖에 없긴 하지만 나와 파트너 윤형진군이 언젠간 이 선수에 대한 더 조사를 하리라 하고 벼르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미하일 안.
1952.2.19 - 1979.8.11
유럽 축구를 흔들었던 위대한 첫번째 고려인



* 참고로 이 글은 2009년 11월에 한 블로그페이지에 썼던 글을 수정-증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