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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힐스보로 참사 - 1. 원인과 시작까지

글쓴이 : 홍차도둑

4월 15일.


이날이 힐스보로 참사가 일어난 날이다. 그래서 글도 이날에 맞춰서 올리고 싶었지만 내용을 정리하다보니 너무 늦어졌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많은 국내의 문서도 완벽한 정리하고는 거리가 좀 있고 단편들이 모인 것들이 많았다... 거의 대부분이 리버풀 팬이 올린 '추모', '이런일은 없어야겠다', '제라드 삼촌'으로 정의되는 좀 뭐랄까... 그 사태의 심각성과 현재까지 이어진 여러 부분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리고 잉글랜드는 지금 응원하는데 펜스 없잖아? 라는 현장을 모르는 이야기까지 줄줄이라... 한번 길어지더라도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앞의 헤이젤 사건의 경우도 사실 모두 다 쓴 것은 아니다. 빼먹은 부분이 좀 있다. 자세한 그날의 이야기들을 언젠가 증보-보충해서 써 드릴 것을 약속한다. 이제 1989년 4월 15일. 힐스보로 경기장의 시계가 정지한 그 시간으로 들어가보자.

[2012년 9월 14일 추가합니다. 2012년 9월 '힐스보러 페널 보고서'가 발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가 이 글을 작성하던 당시의 '정보'외의 다른 정보들이 나왔기 때문에 이 글은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문제의 '헬 게이트 오픈'을 한 책임자가 밝혀졌으며 테일러 리포트에 비해 더 자세한 부분들이 드러났습니다. 이 중 초기 의료조치의 부적절 부분은 테일러 리포트에서도 나온 부분이기 때문에 정서중인 부분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테일러 리포트의 '증보'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술취한 관중'이라는 부분은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문화로선 경기 전 한잔 꺾고 들어가는 것이 종종 있기에 당시 경찰의 선전으로 잘 먹힌 부분이기도 합니다.

글 전체를 손보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전체 글의 수정은 나중에 하더라도 글 앞에 이런 추가부분은 적어놔야 오해의 소지가 줄어드리라 판단됩니다]

 

[힐스보로 사건을 보도한 당시 데일리 미러 지의 첫 페이지. 오죽하면 이사진이 올라온, 힐스보로 참사를 추모하는 20주년 기사의 제목이 "hillsborough was real living hell" 이다. 딱 봐도 이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인가? 이 사진의 어디에 축구에 대한 애정이 있고 자기 팀에 대한 응원과 열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이걸 이용한 경기장 난입의 시도. 이런 지옥이 바로 힐스보로였다. 이후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진은 http://www.munster-express.ie/sports/studsup/hillsborough-was-real-living-hell/에서 가져왔다.
왼편의 자신의 딸의 압사하는 모습을 봤다는 헤드라인과 오른편의 Never Again이 교묘히 배치되어있다.]



- 비극의 씨앗은 뿌려지고...

이날은 FA컵의 4강전이 있던 날이었다. 아스널과 뉴캐슬, 그리고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가 4강전에서 맞붙었다.


그리고 리버풀과 노팅검 포레스트는 힐스보로 스타디움에서 경기가 되기로 확정되어 있었다. 앞서 헤이젤 경기장은 '왜 그런 낡은 경기장에서?' 라는 말이 나오고 그것이 원인중 하나라 설명했던 바 있다. 잉글랜드도 강압적으로 막았다고는 하지만 관중이동에 있어선 신경을 썼다지만... 사실 전례가 있던 경기장이었다. 이미 여기서 비극의 씨앗은 싹이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었다.

1981년 힐스보로 경기장에서 열린 토튼햄과 울버햄튼과의 FA컵에서 관중들이 몰려서 38명이 압사당하는 사고가 이미 있었다. 그렇기에 경기장 설계가 변경되었고 1984년에는 경기장을 크게 다섯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경기장과 관중석은 철망과 철제 구조물로 분리시켰다.

1985년 헤이젤 비극이 있었음에도 스킨헤드들은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 사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잉글랜드 서포터 협회'가 만들어 져 있었음에도 다른 형태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타 팀에 대한 배척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우리 팀을 위해서라면'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져서 '그래도 축구를 위해서라면'이라는 더 큰 대의명분까지 동원했다. 이것이 나중에 더 큰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그들의 그 주장을 막지는 못했고 경기 중에 경기장에 난입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 때문에 결국 경기장과 관중석은 철망으로 분리된다.

그래서 이들을 대표하는 새로운 단어로 '훌리건'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맘때쯤 등장하게 된다. 순수 폭력적인 전위대들이 아닌 축구장의 깡패들을 상징하는 그 단어가 말이다.

[힐스보로 당일의 사진 중 하나. 부상자들을 따로 격리시키지 못하고 경기장으로 옮겨 눕히는 수 밖에 없었다. 당황하는 경찰과 다른 모습의 팬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훌리거니즘의 대형 사고였다. http://www.guardian.co.uk/football/2009/mar/15/hillsborough-disaster-survivors ]


FA컵 4강전 정도 되는 큰 경기라 팬들이 몰려들었다. 훌리건들도 있을 것이 감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표검사와 함께 다른 위해도구가 없는지에 대한 검사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는?

노팅엄 포레스트 팬들은 스파이 온 캅 엔드 쪽을 통해 입장했고 리버풀 팬은 반대편의 래핑스 레인 엔드로 입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출입 검사를 한 뒤 회전문을 통해(한국에서 이런 것을 보려면 미군기지 앞의 문을 보면 될려나... 여하간 쇠창살로 칸을 나눈 회전문이다. 비슷한 것으로는 지하철 입구 들어갈때의 돌아가는 봉을 생각하심 되겠다.)입장이 가능한 구조였다. 그러다보니 관중들의 입장은 늦어지고 있었다.



- 관중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문제의 사건이 터졌다.


많은 한국의 글들이 '관중들이 대거 집중된 시간' 인 오후 2시 40분과 50분 사이... 이때 리버풀의 관중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추정치만 5천명이었다지만 실제로는 더한 집단 군중들이었다.

[ "많은 관중이 몰려오고 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상사태다!"
DVD '힐스보로' 에서의 캡쳐 컷 http://www.moviemail-online.co.uk/film/dvd/Hillsborough/ 에서 가져왔다. 이날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것으로 당시 경찰들의 숫자가 아주 부족했음을 지적한 테일러 리포트에 기반을 둔 영상이다. 1996년에 제작되었다.]


이들이 왜 이 시간대에 몰려들었는가? 대부분의 한국에서 다룬 문서들은 이 부분을 빼 놓고 있다. (딱 하나 있다. 힐스보로 보고서를 참고로 했던 붉은악마가 만들었던 서포터 교육용 책자와 당시 하이텔 축구동에 이 이유가 쓰여져 있었다. 참고로 서포터 교육용 책자는 1999년 시즌에 수원 서포터에게 '수원 서포터용 버전'으로 제작되어 배포된 바 있으나...몇부나 간직들 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잉글랜드의 그동안의 경기 관전 문화를 들 수 있다.

지금도 런던이나 기타 프로축구장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은 PUB 이다. 여기서 맥주 한잔 하고 경기장에 들어가고, 경기 뒤에 맥주 한잔 하는 것이 이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문화였다. 더구나 담배도 하나 꼬나물고 말이다. (다음 글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때문에 당시 경기장의 검색은 더욱 더 강화된 부분이 있었다. 이미 이런 관중문화는 경기장 하나를 홀라당 태워먹은 전과를 가지고 있었다.)

즉...경기시작 시간이 3시로 예정되었을 때 오후 2시 40-50분 사이에 몰려든 관중은 이미 한잔 걸친 관중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선 '경기시간에 맞춰 온 것'이었다. 그런데 경기장 앞에서는 아직도 한참 늘어선 줄과 도무지 줄어들것 같지 않은 상황. 이들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강압적으로 '빨리 들어가자! 경기 시작이다'하면서 당시 경찰 및 관계자들을 압박했다.

더구나 전날 안내된 것에 따르면 티켓을 지니지 않은 팬들은 경기장에 오지 말 것을 요청하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경기장 입장 및 자리찾기는 경기시작 15분 전까지 해야 한다는 공지까지 있던 상황이었던거다. (대부분의 당시 영국 기사들을 보면 분명히 'Drunken Fans'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많은 사이트에 있는 기사들은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 '헬 게이트' 열리다.

경찰은 출구로 사용하던 C게이트를 열어 입장객을 빨리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드디어 '헬 게이트'는 열리고 만다.

[당시 게이트상황, 힐스보로 경기장의 레핑스 레인의 입장 구조도이다. 당시 입장을 받는 위쪽의 Turnstiles(위에 설명한 회전문)쪽으로 입장해야 했으나. 당시 경찰과 경기장 관계자는 경기 뒤의 퇴장문인 Gate C를 열었다. 파랗게 표현된 저 통로를 향해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화살표의 움직임대로 팬들은 움직였다. 그래서 생긴 부분이 바로 힐스보로 비극을 표현한 사진들에 나온 대로 경기장 앞의 철망에 짓눌린 사람들, 그리고 옆의 벽에 짓눌린 사람들 그리고 경기장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 것이었다.
이미지는 http://news.bbc.co.uk/2/hi/uk_news/magazine/7988434.stm 에서 가져왔다. 해당 페이지 중간쯤에는 이날 14:30부터 15:06까지의 관중 흐름도가 나와 있다. 참고하시면 이날 전체의 관중 이동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자세한 부분은 http://www.lfchistory.net/images/Hillsborough/hillsborough.pdf 를 추천한다. 리버풀 구단은 관련 페이지를 만들어서 이날의 참사를 알리고 있다.]


게이트 C의 오픈은, 진정 '헬 게이트 오픈' 그것이었다.


위의 그림에 설명한대로 경기장 입구는 긴 터널이었다.  그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생긴지 몰랐다.  취한 취기의 사람들이 질러대는 소리는 앞의 고함과 구분이 안갔고 정확한 시간을 파악할수 없는 상황, 입장객들은 경기가 시작된 줄 알고 더 빨리 들어가기 위해 계속해서 밀어댔다.

[문제의 입장 터널, 딱 봐도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보인다. 이런 게이트로 10분 동안에 5천명이 넘는 관중이 몰려들었던 것이 이날의 지옥의 시작이었다.
사진출처 http://thehillsboroughdisasterdocumentary.com/ ]



'메뉴얼' 상으로는 한꺼번에 많은 관중들을 받으면 안되었으며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경찰과 경기장의 안전요원들은 관중 통제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헬 게이트 오픈'이라 할 수 있는 Gate C를 누가 열게 했는가? 사람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경찰은 왜 이러한 상황을 몰랐는가? 구장 관리인은 왜 몰랐는가? 왜 막지를 못했는가? 는 현재까지도 제대로 해명된 바 없었다. 이 부분은 경기 뒤에 작성된 '테일러 리포트'에도 분명 지적된 부분이었으며 '통제 불능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더구나 '헤이젤 사건'으로 인해 축구팬들을 통제하기 위한 '통제구역'은 튼튼한 격리지구였다. 위의 사진에서 Pen3과 Pen4는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된 격리지구였다.

[사고 직후의 사진, 경기장의 광고물들과 담벼락이 많이 무너졌음에도 경기장 옆을 나누는 철구조물과 경기장 앞을 막는 철망 자체는 끄떡없다. 당시 영국 경찰의 스킨헤드족 격리정책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진이다. 당시 훌리건들의 쇠파이프 난동에도 끄떡없게끔 설치한 구조물은 이날 상황을 더 악화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사진 http://www.guardian.co.uk/football/blog/2011/oct/17/hillsborough-disaster-liverpool ]



이런 상황을 경기 관계자는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시에 경기는 시작되었다. 경기장의 환성소리를 듣고 경기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 팬들은 맘이 급해졌다.이제 막 게이트를 넘어서 입장 터널에 도착한 팬들은 더 빨리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앞의 관주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자리를 잡았던 입장객들은 경기장 앞으로 밀려갔다. 

펜스 앞에 있어서 앞으로 나갈수도 없는 맨 앞줄의 관중들과 그 부근에 있던 관중은 뒤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았고 시간이 갈수록 압박은 더 거세졌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 오후 3시 6분. 간신히 심판에게 경찰의 긴급전갈이 전해졌다.

전갈을 받은 심판은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힐스보로에 입장한 리버풀 팬들 중에는 이미 질식해 숨진 이도 나온 뒤였다. 너무 늦었던 것이다.
(맨 위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보라. 사진에 나온 이들 중 일부는 이미 사망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기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힐스보로의 무너진 펜스. 이미 사망자가 나온 시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망자가 나오게 된다. 사진출처 http://rac-cuttingsticker.blogspot.com/2012/02/tragedy-sepakbola-terparah-di-dunia.html 참고로 이 페이지는 축구장의 대형 참사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현재 힐스보로는 3위 ]



하지만 힐스보로에 펼쳐진 지옥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