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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보완계획48

아르센 벵거는 인종차별주의자였나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박주영이 아스날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독인 아르센 벵거를 인종차별주의자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스포츠 선수 개인의 성공을 국가의 성공으로, 개인의 실패를 국가의 실패로 여기는 한국다운 참신한 발상이다.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한 선수가 벤치에 머무르는 것은 축구판이란 바닥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다. 이런 선수는 비단 박주영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사랑 부산교통공사 축구단에도 있고, 심지어 북한 대표팀에도 있다.


그러나 스포츠 선수 개인의 실패를 국가의 실패로 여기는 이곳에서는 이를 상당히 괘씸하게 여긴다. 그러니 '대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단지 박지성을 선발에 넣지 않았던 이유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들어야 했고, 다른 곳도 아닌 아시아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던 아르센 벵거는 인종차별주의자로 전락했다. 


안타깝게도 박주영은 아스날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적시장 마지막 날에 뒤늦게 합류했고, 그 시점에 아스날은 최악이었다. 회복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쟁의 압박이 덜한 칼링 컵에서 기회를 받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동안에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반 페르시는 커리의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이는 박주영에게 돌아올 순번이 자꾸만 늦춰진 결정적인 이유였다.


문제는 선발출전 기회를 받았던 챔피언스리그 마르세유전에서 자신의 기량을 어필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경기에서 박주영의 파트너로 제르비뉴와 월콧이 아닌 영리한 아르샤빈이 나섰다면, 박주영은 더욱 편안한 상태에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운이 없었다. 제르비뉴와 월콧은 박주영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로 각자의 재롱잔치에만 열심이었다. 


이를 계기로 아르센 벵거는 간헐적으로 부여했던 출전시간마저 허락하지 않게 된다. 아스날은 그야말로 4위권 수성에 목숨을 걸어야 했고, 아직 팀과 리그에 적응하지 못한 박주영을 출전시키는 모험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결국, 여기에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이것이 대단히 비상식적이거나 부당한 처사가 아니란 뜻이다.


박주영 개인의 활약에 맥락이 존재하는 것처럼 아스날의 결정에도 맥락이 존재한다. 아스날은 반 페르시의 득점력에 클럽의 운명을 걸어야 했다. 또 한 명의 경쟁자였던 마루앙 샤막 또한 지난 시즌과 다르게 별다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과연 모로코에서도 아르센 벵거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하고 있을까?


박주영으로 장사를 해야 하는 미디어는 박주영이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두고 한국을 무시하는 아스날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스날 경기를 중계하는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승패의 대세가 기울어 그리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도 박주영을 출전시키라며 목놓아 울부짖었다. 


그러다 끝내 박주영이 출전하지 않으면, 긴 탄식과 함께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갔다. 중계에 집중하던 사람들에게 이것이 마치 너무나 부당하고 스포츠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음을 의심하게끔 만든 것이다. 즉 박주영 출전 자막이 올라간 경기와 관련 뉴스들은 축구가 아니라 온갖 정념이 뒤섞인 축구 포르노에 가까워졌다.


여전히 박주영에겐 뛰지 못한 경기보다 뛰어야 할 경기가 더 많이 남아있다. 아스날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박주영의 커리어가 끝난 것도 아니다. 아스날에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고 싶다면 다시 한 번 경쟁에 참여하면 된다. 설령 임대나 이적을 간다고 해도 경쟁을 피할 수는 없다. 세상 어디에도 확고한 주전을 보장하는 클럽은 없다. 톱 무대에서 경쟁은 피할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다. 


그 어떤 일에도 부당한 것은 없다. 아스날은 대한민국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아르센 벵거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박주영은 주전 경쟁과 출전시간 확보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상황에 부닥쳤을 뿐이다. 여기에 인종차별이 들어갈 이유는 없다. 무거운 함의를 담고 있고 인종차별이 이토록 가볍게 쓰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자국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가 어쩌다 축구 포르노에 가까워졌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런 괴상한 취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괴상한 취미를 갖도록 요구하는 이들의 장사는 짭짤하게 번성하고 있다. 그들에게 아르센 벵거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대한민국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다. 쓰지도 않을 선수를 괜히 영입해서 모진 핍박과 인종차별로 정신적, 육체적인 고문을 서슴치 않는다. 안 쓸 거면 다른 팀에 보내면 되는데 인종차별의 맛을 알아버린 아르센 벵거는 절대로 박주영을 보내지 않는다. 영원한 고문이 이어진다... 


이게 축구 포르노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Text by 배정훈


Photo by 아스날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