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페르시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아스날에서 성장한 소년이 남자가 되어 아스날을 떠나는 장면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는 아스날이 매년 여름마다 맞닥뜨리는 운명의 데스티니와도 같은 것으로, 아스날 팬들은 이 운명을 피하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의 끝은 벵거를 향한 조롱으로 끝이 난다. 누구나 "다음 시즌에야말로 당신과 아스날은 처참한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아스날 커리어도 마지막이 되겠지."라고 얘기한다. 아시겠지만, 벵거와 아스날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심지어 지난 시즌에는 라이벌 맨유에 8-2로 처참하게 패배하고서도 살아남았다. 이상에 젖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벵거도 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또 한 번 위기관리능력을 증명했고, 연봉총액 5위의 아스날을 리그 3위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반 페르시는 최고의 조력자 역할을 해냈다. 아니, 지난 시즌 반 페르시의 영향력은 벵거 이상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그 전 경기에 출장해서 30골을 폭발시킨 반 페르시가 없었다면, 아스날의 자신감 회복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운명의 시작이었다. 소년이 남자가 되어 아스날을 떠나는 어쩌구 말이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스날에 몸담았던 반 페르시는 리그 3위가 아스날의 현실적인 위치임을 알고 있다. 가깝게는 시티와 첼시, 멀게는 레알과 바르샤가 버티는 시장에서 검증된 슈퍼스타를 영입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아스날의 현실적 어려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8년 동안 얻은 타이틀이라곤 FA컵 우승이 전부다. 그것도 7년 전의 일이었다.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 페르시 또한 아스날과의 미래를 거부했다. 그런데 방식이 조금 독특했다. 무려 공식 성명서를 통해 더 이상 아스날 소속이 아닌 자유의 몸이 됐음을 만천하게 알린 것이다. 한 번 더 미팅을 가질 예정이라고는 하나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성명서에 담긴 모든 내용이 과거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반 페르시와 아스날 사이에는 1년이라는 계약기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클럽과 뜻이 맞지 않아 이적을 결심하는 것은 선수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반 페르시는 남은 계약기간을 무시하는 것으로 모자라 과거형으로 점철된 공식 성명서 발표로 존중을 받을 기회를 잃었다. 그의 결정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 아스날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 먼저였다. 타이틀을 향한 열망이 있다고해서 소속 클럽에 모욕감을 안길 필요는 없다.

사실 이런 요란을 떠는 맥락을 간단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휘청이는 유럽경제와 엄격한 FFP 도입은 유럽의 이적시장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 대표로 유로에 참가한 반 페르시는 기대 이하의 활약으로 일관했다. 아마도 반 페르시와 그의 에이전시는 이런 상황들 때문에 받을 수 있는 타격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지난 시즌의 이미지'가 희석되기 전에 서둘러 아스날을 빠져나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 페르시는 최고의 공격수였다.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골을 넣어주는 구원자였으며, 주장으로서의 리더십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성명서에는 자신의 결정이 아스날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것인지의 맥락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이것이 지난 시즌의 활약으로 얻은 권리인지, 아니면 유로에서의 실패로 말미암은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스날에서 반 페르시라는 존재는 떠나기 전후로 문제가 끊이지 않았던 아데바요르보다 더 빨리 삭제될 것이라는 점이다. 아스날이 재정 건정성과 클럽의 영속성을 위해 지금의 고난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이 또한 반 페르시 자신이 가볍게 입을 놀린 대가이다. 

Text by 배정훈

Photo by 아스날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