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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보완계획48

영국전 승리가 기적이 아닌 이유



올림픽 축구대표의 영국전 승리는 명백히 전술적인 승리였다. 상대 팀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상대 팀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이 경기는 대표팀과 태극마크가 지닌 가치의 구현이라는 뜨거움과는 별개로 올림픽 8강이란 무대에서 대표팀의 진가를 발휘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승리를 '기적'이라 부르지 않는다.



조별예선과는 다르게 주도권과 볼 점유라는 측면에서 자유로워진 대표팀은 본래의 장점인 수비적인 방법론을 선보였다. 아시아 지역예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영국의 롱패스를 의식해서 라인을 보다 낮은 지역에 형성한 점에 있었다. 최종 수비라인과 중원의 긴밀한 협력, 강력한 압박 등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역을 나눠서 압박하다가 위급한 상황에선 재빨리 대인방어로 전환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지동원의 선발 출전은 조 앨런과 톰 클레버리가 아론 램지의 뒤를 받치는 영국의 중원 구성에 대비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동원은 오랜 시간 동안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비축한 체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운동량과 강한 압박을 통해 중원을 중심으로 풀어가려 했던 영국의 계획을 사전에 차단했다. 공격수 지동원을 활용한 중원장악이란 승부수가 효과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에는 기본적인 수비능력 외에 뒤에서부터 경기를 조립할 수 있는 이른바 '현대축구가 요구하는 중앙 수비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원에 너무 많은 선수들이 뒤엉키는 관계로 최종라인에서 패스의 기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러나 영국의 중앙수비 1호 마이카 리차즈는 운동능력만 믿고 돌진하다 자폭했고, 2호 스티븐 콜커는 자기진영에서 무의미한 횡패스만 반복할 뿐이었다. 지동원이 조 앨런을, 박주영이 톰 클레버리의 견제를 전담하면서 중원에 패스할 선수가 없어지자 패닉에 빠진 것이다. 영국이 눈치를 채기도 전에 대표팀은 이미 중원을 장악한 상태였다. 측면을 활용하려 해도 대표팀의 강한 압박 때문에 바깥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영국은 정말로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영국의 전술적 딜레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측면이 여의치 않자 고립된 다니엘 스터리지의 활동폭도 점점 좁아져만 갔다. 뿐만 아니라 수비적으로도 느슨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선제골 허용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다니엘 스터리지가 수비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 열린 공간을 확보한 황석호가 정확한 롱패스를 전달하여 선제골의 기점을 만들었다. 




영국이 전술적 딜레마에 빠진 사이에 대표팀은 공간분담과 협력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수비적인 방법론이 있었기에 부상이라는 변수가 발생했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을 선보였다. 전술적인 대응과 조직력, 그리고 플레이 수준에서 대표팀은 승리할 자격이 있는 팀이었다. 선수에 대한 믿음이란 바탕 위에 명확한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대표팀을 하나로 이끈 홍명보 감독의 매니지먼트도 돋보였다.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 '단일팀' 영국이 누차 지적받았던 정신적 한계로 자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작 국가가 흐르던 순간에는 영국 선수들이 더욱 힘차게 국가를 따라 불렀다. 영국의 자멸은 뜨거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자원과 전술적 한계에 의한 것이었다. 영국의 유일한 성과는 늘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경기를 펼치다가 승부차기에서 무너지는 패턴의 재현으로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익숙한 즐거움을 선사한 것이다. 



반면 대표팀은 공격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수비조직과 중원장악이란 면에서는 지난 몇 년간에 걸친 노력의 집대성을 선보였다. 무작정 흐름을 좇으며 수시로 방향성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타협을 거친 방법론을 채택함으로써 큰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대표팀을 바라보는 모두가 최초 메달획득이라는 가능성과 태극마크의 뜨거움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 대표팀은 올림픽 이후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방향성을 보여줬다. 



뜨거움은 금방 식는다. 방향성이야말로 한국축구의 모든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젊은 대표팀이 브라질을 상대로도 진가를 발휘하길 바란다.



Text by 배정훈


Photo by 대한축구협회 홍석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