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브라질전 패배의 충격을 잊기 위해 훈련장 근처 공원을 산책하던 홍명보 감독. 10분 남짓 걸었을까. 우연히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홋, 멋진 남자..."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일본 대표팀 감독, 세키즈카 다카시. 가벼운 악수라도 하고자 다가간 홍명보 감독에게 세키즈가 감독은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하지 않겠는가"

지옥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동메달 결정전의 상대가 숙적 일본이라니. 올림픽 4강 진출은 대성공임이 틀림없지만, 일본전 결과에 따라 여론이 급격하게 뒤집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이번 한일전을 둘러싼 분위기는 'All or Nothing'에 가깝다.

온 국민이 애국심에 불타는 이 시점에 찬물까진 아니고 미지근한 물을 끼얹자면, 일본은 있다. 그것도 꽤 강하다. 내 몸 어딘가에 있을 내셔널리즘을 최대한 끄집어내더라도 이번 올림픽에서 보여준 일본의 경기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에서 오카다 저팬이 그랬던 것처럼 세키즈카 저팬 또한 계속된 비판과 실패를 교훈 삼아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다.

세키즈카 저팬이 각성하게 된 계기는 올림픽 전에 참가한 툴롱 토너먼트에서의 대실패였다. 아시아 예선에서 답답한 경기내용을 선보여 비판에 휩싸였던 세키즈카 저팬은 최종 모의고사로 임했던 툴롱 토너먼트에서 1승 2패, 5골 7실점이란 최악의 결과를 얻게 된다. 매 경기 2골 이상을 실점한 수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대로는 올림픽 1승도 어려울 것이란 비관적인 예상이 쏟아졌다.

비판에 직면한 세키즈카 감독의 결단은 팀 컬러에 변화를 주는 것이었다. 짧은 패스를 통해 최대한 볼을 점유하며 능동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형태를 포기하고, 재빠른 역습 위주의 팀으로 변모시켰다. 툴롱 토너먼트에서 드러난 수비 불안은 강력한 압박과 선수 전원의 협력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이런 급진적인 변화는 선수 구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우사미 타카시가 벤치 멤버로 전락했다. 감바 오사카 유스 시절부터 천재 드리블러로 주목받으며 나이별 대표팀 에이스를 담당했던 우사미의 벤치 행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우사미를 벤치에 앉힌 세키즈카 감독의 의도는 명확횄다. 개인 돌파 의식이 강한 우사미로는 공격진의 유동성을 살리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반대로 아시아 예선부터 줄곧 벤치를 지켰던 공격수, 나가이 켄스케는 주전으로 도약했다. 상대 팀을 최대한 끌어내다가 찰나의 빈틈을 파고들고자 했던 세키즈카 감독은 활동량과 스피드에 강점이 있는 나가이를 과감하게 주전 원톱으로 기용했다.

세키즈카 감독의 모험은 대성공이었다. 원톱 나가이의 활동량과 스피드를 기점으로 상대 뒷공간을 공략하고,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중앙으로 쇄도하는 역습을 통해 우승후보 스페인을 잡는 이변을 일으켰다. 특히 존재감이 없는 10번이라 평가받던 히가시 케이고는 헌신적인 수비가담을 선보이면서 우사미와의 차별성을 증명했다. 

즉 세키즈카 감독은 팀에 대한 헌신과 협력, 나아가 에이스 한 명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변화된 팀 컬러와 선수 구성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이에 따라 수비를 게을리하지 않는 공격진, 안정감 있게 경기를 이끄는 중원, 캡틴 요시다 마야의 존재감이 빛을 발하면서 4경기 연속 무실점이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한국 선수들이 품은 동기부여 못지않게 일본 선수들 또한 한일전에 대한 남다른 동기부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 일본의 올림픽 세대는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번번이 한국에 패배했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08 AFC U-19 선수권 8강전에서 구자철, 김보경, 김영권 등이 포진했던 한국에 0-3 대패를 당했다. 이걸로 모자라 2010 AFC U-19 챔피언십에서 2-3 패배로 좌절하며 20세 이하 월드컵 출전권을 한국에 양보하기도 했다. 당시 우사미는 분한 마음에 폭풍 눈물을 쏟아냈다.

물론 일본에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톱 나가이는 일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최종 수비라인을 낮은 지점에 형성하여 뒷공간을 지울 경우에 나가이의 역할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볼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술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은 수비형 미드필더 콤비인 야마구치 호타루와 오기하라 타카히로를 공략할 필요가 있다. 전방위에 걸친 압박이 아닌 패스의 줄기가 되는 곳에 전략적인 압박을 가함으로써 일본 공격진의 유동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의 울분을 터뜨릴 수도 있는 우사미에 대한 경계도 늦춰서는 안 된다.

이번 한일전은 한일 양국이 장기간에 걸쳐 전략적으로 육성한 젊은 선수들의 진검승부다. 어쩌면 이 경기의 결과가 올림픽 이후의 방향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경기를 둘러싼 심리적인 부담감에서 벗어나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경기를 기대한다.

Text by 배정훈

Photo by 아사히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