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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The Game

붉은 악마의 결연한 레바논행.

text by 홍차도둑

-대표팀 서포터인 붉은악마가 레바논행을 결정했다.

"붉은 악마 극적 레바논행" <- 기사는 클릭해서 봐 주시고.
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breaking/view.html?cateid=1027&newsid=20130530193906547&p=yonhap

힘든 결정이었겠다.
언론보도가 난 직후 카톡으로 반우용 붉은악마대위원회의장인 반우용 군에게 응원메시지를 보냈다.
동갑내기로 붉은악마 초창기부터 많은 활동을 같이한 친구인 우용이.
얼마나 고민했을까...
보도를 보면서 옛일이 떠올랐다.

-1999년 상해, 1997년 도쿄, 1998년 프랑스.
1999년 가을의 일이었다. 상해. 그날은 올림픽 아시아지역예선전이 열린 날이었다.
중국쪽의 응원단의 극성이라는 것은 익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때가 막 치우미의 태동 즈음이었을 것이다. 경기 전날 상해공항에 도착했을 때 부터 분위기는 숭숭했다. 취재진 외에도 다른 축구팬들이 와서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을 보았고 공항 전체의 분위기가 우호적이지 않았다. 중국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티탄저우보의 기자인 송청운 형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입국때부터 문제가 났을 것이다.
경기 전날 숙소에서 같이 있으면서 여러 정보를 주었는데 경기장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거, 중국 축구팬들이 이번에야 말로 한국 이길 기회라면서 경기장을 완전히 중국 분위기로 몰아갈 여러 준비가 되어 있고 중국 공안도 붉은악마를 보호하기 위해 경기장 2층에 붉은악마를 배정할 것이라 했다. 그 외에도 다른 유학생들도 같이 한군데에 모을 것이란다.
'1층에서 선수들과 가까운 곳에서 응원하고 싶다'는 우리의 바람은 묵살되었다. 후에 생각해도 중국 공안들은 분명 최선의 배치를 해 준 것이기도 했다. 만약 경기장 1층에 있었다면 2층에서 중국 관중들은 한국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마구 물건을 던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경기 당일 호텔에서 이동하는데도 경기장에 한참 일찍 들어갔는데도 중국 공안이 길을 만들어 주기 전 까지 버스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도쿄대첩' 때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시간을 돌려 '도쿄대첩'을 회상해 보면...
'도쿄대첩' 당시 붉은악마중 제1호로 경기장에 입장한 것은 나였다.
아침부터 모 방송사와 다투면서 진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방송사는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붉은악마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했고 그 요구가 잘 안들어지자 욕설도 나왔다. 그 때문에 이런저런 실랑이가 생겨서 이미 진이 빠진 상태였다.
경기장으로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분위기 안좋다는 이야기가 계속 신인철 회장의 전화기로 전해져왔다. 거기다 요요기 경기장 입장 전에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한 사람이 일본 야쿠자틱한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집단린치로 두들겨 맞는 것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암표 팔다가 걸려서 이른바 '나와바리' 건드린 문제로 두들겨 맞던 한국 암표상이었...-_-;;; 하지만 그걸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 유니폼 입은 사람이 두들겨 맞고 있으니 완전 버스 안의 분위기는 싸~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들어가냐를 놓고 참 말이 많았다. 화장실도 가기 어렵고 경찰은 언제 들어오라는건지 연락도 없다. 우리를 위한 좌석도 얼마 없었지만 잘못하면 경기장 못가는 거 아니냐는 말도 들렸다. 아무것도 못하고 진은 빠지고...아...아닌데...이건 아닌데...이런 갑갑함에 못이겨서 결국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들이 '갑시다' '응원하러 온거 아니오,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시도도 안하면 이게 응원하러 온겁니까' 하면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당시 같은 나이인 나, 송흥종(안양), 허남준(포항), 박준협(울산)은 갑갑함을 호소하고 가자! 하고 그랬으니까.
결국 신인철 회장은 나를 선봉장으로 지명하고 응원 깃대와 큰북을 들고 "가자 경기장에!" 하고 말했다. 이게 경기 시작 약 3시간 전의 일이었다.

경기장 들어가기 20여분동안...
주변 일본인들의 야유, 환호, 함성은 지금도 눈 앞에 바로 보인다.
나는 일본애니와 일본만화를 좋아한다고 간단한 일본어들은 알아듣는 바람에(나중에 그거 때문에 골키퍼 가와구찌가 한국 응원단을 향해 박규 날리는 순간 '가와구찌 오마에 고로스!'하고 외치면서 저지선을 뛰어넘으려 했다가...일본 경찰에게 체포될 뻔...-_-;;;) 참 속이 뒤집어졌다.
그나마 그땐 물건투척은 없었다. 아마 경찰이 잘 보호해 줬기 때문일까...욕설은 많이 들었지만 물건에 맞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날의 상해는 도쿄가 아니었다. 1999년 이후 중국과의 경기에서 중국 관중의 나사못 투척 사건이 있었는데 그 전조가 바로 그날이었던 것 같다.
결국 그날 이동국의 골로 한국은 올림픽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붉은악마는 경기장에서 두시간 넘게 나오지 못했다.
경기 끝난 직후 나부터도 얼굴에 사과를 직격으로 맞았다....-_-;
그날 왼쪽 사이드에 배치되었는데 그것도 가장 바깥에...그 이유인즉.

"니가 방패가 되라"
"중국사람들이 분명 뭔가 던질텐데 니 뒤에 우린 숨겠다"

...그대로 되었더라...-_-;
볼 컨트롤 좋은 중국인...정확하게 관자놀이를 맞춰버리더만...-_-;
중국 공안이 계속 우리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맞아버리니 순간 정신이 나가버려서 달려드려는 순간 선배들이 나 꽉 잡고 "얌마 너 여기서 잡혀가면 못빼내!"하고 말리지 읺았으면...휴우...-_-;;;

이번은 이런 여행은 아닐 거다. 총과 포탄이 난무하는 곳이다. 그나마 내가 겪은 일은 애교에 불과할거다.
레바논보다 상태가 좋다는 이라크도 하루에 몇십명씩 죽고 백명 단위의 부상이 '그나마 평화로운 날'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태란다.
이미 모 종교에서는 여행금지 국가 지정이 되었음에도 가서 큰 사고를 쳤다. 붉은악마까지 그런 일에 말려들면 안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가려 했을까? 막말로 공항만 들렸다 경기장만 갔다 오는 갑갑하기만 하더라도 꼭 응원하러 가야 한다는 것은 왜일까?

-깃발을 올려라
도쿄대첩 이후 우리 대표선수들이 나이불문, A외에 클래스 불문하고...이역만리에서 먼저 찾는것은 '붉은악마'의 깃발이었더 거다.
1997년에는 막 태동되던 때였고 서포팅이 활발하던 세팀 외의 선수들은 '저 사람들 뭐야?' 하고 축구선수들 안에서도 바라보던 시각이 1999년에 완전히 달라진 거였다. 1995년 동대문에서 한국 최초의 축구 서포터가 시작되었다.(부천 1995의 1995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수원과 안양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선수들이나 코칭스탭들이 "구단에서 알바 썼나?" 했었을 정도였다. 어느정도 시간 지난 뒤에야 "알바가 저정도로 축구장 따라다니면서 저렇게 응원할수는 없는데?" 하면서 실상을 알고 그제서야 '우리 응원하는 사람들'로 알기 시작한 그런 초창기였다.

시간을 돌려서...1998년 네덜란드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선수들은 붉은악마를 잘 보지 못했다. 1층의 말하기도 싫은 모 가수가 주도하는 응원단체는 응원이 아닌 자기홍보에만 바빴고 붉은악마의 깃발은 들고갈 수 없었다. 1차전때 17명이 경기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곳곳에 걸었던 대표팀 유니폼과 태극기는 2차전에서는 달지도 못했다.
모 가수의 응원단체는 그런 협조를 애당초 거부했으며(제길 정말 멕시코전때 그 응원단에서 김흥국 캐리커쳐 피켓을 단체로 든 것은 지금도 절대 용서할수 없는 일이었다. 선수나 감독의 캐치커쳐도 아니고 왜 그 가수의 캐리커쳐가 축구장에 응원도구로 등장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현재 교민회도 그러했다. 거기에 제대로 응원 결집도 못했다. 분산될수는 없는 상황으로 판단되었다. 1층 자리는 모 가수의 응원팀과 교민들이 자리했고 약 50여명밖에 없는 붉은악마는 일단 경기장 2층 상단의 한곳에 모이겠다고 계획을 변경했다. 우리의 소리라도 한목소리로 내는데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은 이건...스터드 밸로드롬은 완전 불타는 오렌지 밭(히스토리 후 에서 그렇게 회술했지만 정말 이건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다)에서 오랑제들의 나팔소리, 응원소리 앞에서 선수들은 이건 뭐...로마 검투기장에 내몰려진 물고기 역할을 하는 패배자들 그 자체였다. 이건 도무지 기도 못펴고 주눅들어서 뭘 하는지 모르고 있더라.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게 어리디 어린 고종수와 이동국이었던거고.

그나마 5:0으로 진게 '잘한거다' 라고 밖에 못하겠는 경기였던 거. 경기장 분위기 상으로는 0:10 나도 이상한게 아닌 경기였다.
오죽하면 '김병지 최고의 경기'를 꼽아달라 하면 K리그 챔피언 결정전 포항과의 플레이오프에서 막판 동점골을 넣고 승부차기까지 막아내고 이긴 경기와 함께 1998년 네덜란드와의 경기를 꼽을까. 그날 김병지의 선방쇼가 아니었으면 10:0 정말 났을지도 모른다.
선수들도 나중에 '그날 경기를 어떻게 뛰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회술한다. 네덜란드 응원단에게 제대로 밀린 거였고 경기장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당해 선수들이 제 기량도 발휘 못한 예가 되었다. 그날 경기장에 있던 붉은악마는 독기가 올랐다. 응원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경기장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 우리 선수들이 아무 힘도 못쓰고 그냥 죽는 거구나. 괜히 전쟁이라 불리는게 아니구나...

그리고 3차전, 벨기에전에서는 한국에서 300여명이 한꺼번에 왔다. 붉은악마만 수십여명이 날라왔다. 그리고 이들은 같이 온 코카콜라 응원단을 비행중에 응원레퍼토리를 완전히 가르쳐서 왔다. 이날 분위기는 후반전은 완전히 붉은악마의 판이었다. 그날 경기를 보면 아실 것이다. 한국인들의 목소리가 빡끄 드 쁘랑스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던 것을, 그날 전반에 벨기에의 응원을 막기 위해 벨기에 응원단이 주도한 파도타기 응원을 일부러 안하는 등, 분위기가 벨기에로 넘어가지 않도록 별별 일을 다 했었다. 그리고 후반들어 응원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정말 미쳐있었었다. 그만큼 필사적이기도 했다. 거기에 힘입은 우리 선수들이 유럽의 강호중 하나인 벨기에를 사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모습을, 그날 붉은악마의 응원에 경악한 경기장의 다른 유럽인들의 표정을 난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그 이후부터 대표팀은 붉은악마를 찾는 모습이었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그걸 느끼고 그걸 알게 되었다.
1999년의 상해 경기 이후 직접 선수들에게 물어 보았었다.
"그날 막 여기저기 쳐다보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봤는데...왜 그랬어요?"

그들의 답은 내 가슴속을 뭉클하게 했다.
"붉은악마를 찾고 있었죠, 1층에 안보여서 불안불안했어요, 2층에 보니까 보이더라고. 그때야 안심했어요, 우리 응원단이 왔다. 이런 분위기라는거 알면서도. '적지'인데도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왔다."

그날 본선행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이유가 뭔지를 그때 알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양궁 결승전에서 본것같은 분위기의 20배급이라고 보면 될 정도의 경기장 분위기였다. 중국 축구팬들의 응원 함성은 경기장을 가득 채운 것도 모잘라 하울링과 에코 현상으로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고, 적대하는 모습들 달려들거 같은 공포분위기에 경기장을 곳곳에 체운 제복의 중국 공안들...
그런 모습은 이제 20을 갓 넘은 선수들에겐 불안함과 공포 그거였을 거다. 그런데도 2층의 붉은악마를 보고 그들은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왔다' 라고 안심해했단다.

그날 경기는 격전이었다. 그래도 우리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은 끝까지 침착하게, 밀리지 않고, 중국 관중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경기를 할수 있던데에 작은 힘이 정말 되었던 거구나...내 목소리도 선수들에게 전달된거였구나...하고 직접 느낌이 오더라.


[2005년 가을. 상암에서  펼쳐진 세르비아와의 경기 전. "어둠에 떨지마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 말은 서포터의 영원한 노래 You'll never walk alone의 가사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을 응원하는 우리가 있다. 원래 가사의 뜻은 은유를 사용해 다른 뜻도 있지만...구절만 본다면 그렇다. 언제 어디라도 서포터는 간다. 당신을 응원하기 위해. 험한 곳이라도 우리 선수들은 혼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서포터의 주제곡이 된 것이다. 그 험한 레바논에도 붉은악마는 가는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응원하는 선수들을 혼자 있게 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함께하기 위해 말이다.    - 사진 홍차도둑]

- 전쟁중인 레바논
이번도 마찬가지일거다. 이번 레바논 원정은 시리아 내전까지 끼어든 문제다. 엄청 위험해졌다. 골치아픈거다. 괜히 그 동네가 '화약고'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완전 막장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앞서 말했지만 레바논보다 평온하다는 이라크도 하루에 수십명이 죽는다는 상황이다. 선교단 때도 그렇지만 붉은악마 라는 단체가 테러를 당한다면 큰 문제다. 잘못하면 대량인질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외무부에서는 만류를 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전 문제는 반우용군을 비롯해서 다른  붉은악마 대의원들의 머리를 골치아프게 했을 것이다.

외교통상부가 붉은악마에게 출국 자제를 요청하는 기사를 봤을 때, 나는 지인들에게 '붉은악마는 레바논에 갈겁니다' 라고 말했다.
1999년 확인한 선수들과 서포터의 믿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들을 응원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믿는 사람들이 저렇게 고생을 하면서 오고, 그리고 목이 터져라 손이 찢어져라, 경기장에서 자신들을 위해 외치고 울고, 웃고 그런다.
그들은 언제나 온다 하고 선수들은 알고 있다. 그 믿음을 져버리는 것은 붉은악마가 아니다.
그러기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했을 것이고 '관광'이라는 '짜투리 시간'을 '공항 안에서만 있는' 안전을 위한 동선 최소화라는 방안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전의 이란 원정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써 봤으니까. 물론 축구협회나 외무부도 경호인력을 동원하고 대비를 해 준다 하지만 소영웅주의자가 나오지 않고 끝까지 안전하게 다들 일정을 신중하고 안전하게 했으면 좋겠다.

앞에 들은 세가지 예 중 두가지에 우용이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응원의 힘, 그리고 응원을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 '가야 한다. 붉은악마는 축구 대표팀의 경기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선수들이 힘든 원정일 때, 위험한 원정일 때일수록 더더욱 가야 한다. 선수들에게 우리를 보고 '붉은악마가 왔다'는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안심을 주고 힘을 주어야 한다'는 맘이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무사히, 잘 다녀와라 우용아.
이번엔 내 사정이 좋지 못해서 함께가지 못하지만, 다음에는 너만 고민하고 현장에서 고생하지 말고 같이 하자.
그리고 안전과 기쁨을 가지고 돌아올 것임을 난 믿고 있다. 힘들겠지만 잘 다녀와라.
돌아오면 같이 못간 형님들, 동생들과 함께 한 번 같이 보자. 이번 경기에 안전과 승리가 함께하길.


-2013년 5월 30일 붉은악마대위원회 위원장 반 우 용 에게
영원한 친구 양 원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