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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구단주 별전 - 우스마노프

 

포브스 기준 러시아 1위, 전 세계 28위 부자. 우스마노프는 대체 어떤 인간일까요? 이글루스 sescoman님의 궁금함에 보답하고자 정리해 봅니다.

 

한 명만 다루는거라 분량에 제한이 없으니 조금 자세하게 써보죠.

 

2012-13시즌 축구 구단주 열전
(1) 웨스트햄/사우스햄튼/레딩/QPR/아스톤 빌라
(2) 위건/스토크/선더랜드/노리치/스완지
(3) WBA/풀럼/리버풀/에버튼/첼시
(4) 뉴카슬/토트넘/아스날/맨유/맨체스터 시티
(5) 삼프도리아/토리노/페스카라/제노아/팔레르모
(6) 칼리아리/시에나/피오렌티나/아탈란타/카타니아
(7) 키에보/볼로냐/파르마/로마/인테르
(8) 나폴리/라치오/우디네세/밀란/유베
(9) 트루아/랭스/바스티아/로리앙/아작시오
(10) 브레스투와/소쇼/니스/발랑시엔/낭시
(11) 마르세유/에비앙/툴루즈/생테티엔/렌
(12) 보르도/리옹/릴/PSG/몽펠리에
(13) 알라니야/모르도바/볼가/로스토프/크릴리야 소베토프/테렉
(14) 암카르/크라스노다르/쿠반/로코모티브/루빈 카잔

(15) 안지/디나모/CSKA/스파르타크/제니트

별전 - 우스마노프


 

 

알리쉐르 우스마노프 - 자수성가형 올리가르히

 

소유 구단: 아스날 (지분 29.72%)
주 업종: 광산/철강/자산 운용
재산: $ 18.1 billion

 

펜싱 소년
1953년 9월 9일 생, 현재 독립하여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된 구소련 우즈벡 공화국 나망간 태생. 아버지는 공화국 수도 타슈켄트에서 검찰이었던 부르한 우스마노프. 4형제 중 장남. 이처럼 엘리트 집안 자제였던 우스마노프의 어릴 적 취미는 무려 펜싱이었습니다. 소설 "삼총사"를 너무나 감명깊게 읽은 우스마노프가 칼싸움에 빠져 살자 부모님이 그를 펜싱 학교에 보내면서 할거면 제대로 배우라 시켰죠. 2년의 훈련 끝에 우스마노프는 우즈벡 공화국 펜싱 청소년 대표팀 상비군에 뽑히는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비록 학업을 위해 중간에 꿈을 접게 되지만 펜싱이 우스마노프 인생에게 남겨준 선물이 하나 있었죠. 바로 훗날 우스마노프의 부인이 되는 이리나를 펜싱 대표팀 시절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당시 기계체조를 하던 이리나를 보고 우스마노프는 한눈에 반했었다고 해요.

 

모스크바
18살 우스마노프는 타슈켄트를 떠나 모스크바에 유학을 가겠노라 선언합니다. 부모님과 조부, 특히 조부는 우스마노프가 왜 고향 우즈벡을 떠나 모스크바로 유학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죠. 우스마노프는 말했습니다.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MGIMO)에서 외교대사들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어요!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MGIMO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우스마노프. 이때 같이 대학생활을 보낸 53년생 친구 중에는 훗날 러시아 대통령 외교비서관이 되는 세르게이 예스트르젬스키, 카자흐스탄 출신으로 벨기에 국적 획득 후 포브스 기준 벨기에 2위 부자($2.8 billion)로 평가되는 파톡 초디에프가 유명하죠.

 

5년의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1976년 23살 우스마노프는 타슈켄트로 돌아옵니다. 타슈켄트 검찰 아버지의 아들로 러시아 명문대학 MGIMO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우스마노프의 삶은 평탄하게 풀리는 듯 했습니다. 소련 최고 학술기관인 과학아카데미 소속 연구원으로 사회과학을 연구했고, 소련 공산주의 청년동맹이었던 콤소몰 우즈베키스탄 지부 수석 자문으로 일했죠.

 

시련과 재기

잘나가는 소련 청년 우스마노프는 1980년 큰 시련에 직면합니다. 우즈베키스탄 KGB 부국장 아들 바하디르 나시모바, 우즈벡 공화국 농업장관의 아들 일함 샤이코바와 함께 경찰에 체포된 것입니다. 죄명은 사기, 횡령 등이었는데 우스마노프는 법정에서 8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복역하게 되죠. 믿거나 말거나 이 사건에 대해 우스마노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20대 중반 젊은이였던 우리들이 무엇을 알았겠나. 실은 우즈베스탄 공화국 내 권력층 부모들 파벌싸움의 희생양이었지." (실제로 2000년 러시아 대법원은 이 사건의 당사자 셋을 복권시키며 당시 사건이 조작되었다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검찰이었던 아버지가 직접 감옥에 보낸 범죄자들과 한 교도소에 지내게 된 우스마노프. 그는 이 시절을 지옥과도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감옥에서 6년을 보낸 우스마노프는 1986년 모범수로 풀려납니다. 전과 때문에 공산당 엘리트로 공직의 길을 밟을 수는 없었던 우스마노프. 자신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우즈벡에서는 살기 힘들다 판단한 그는 다시 모스크바로 넘어갑니다. 다행히 MGIMO 대학 시절 은사였던 라도미르 보그다노프 교수의 도움으로 민간기구인 소비에트 평화 위원회 산하 해외경제협회에서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죠.

 

폴리머와 담배
정관계의 길이 막힌 우스마노프는 이런저런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 회고에 의하면 이 당시 우스마노프는 공학경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동시에 폴리에틸렌, 폴리우레탄 등을 다룬 화학공학책을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사업구상을 마친 우스마노프는 모스크바 주에 위치한 라멘스코예 시장을 찾아갑니다. "나는 그들에게 사업구상을 들려주었지. 폴리머 공장을 견학시키면서 당신네들도 이런 시설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걸로 돈도 벌 수 있다고 말해줬어." 이전의 계획경제 소련이라면 꿈도 못꿀 일이었으나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 시장원리가 도입되던 당시에 이런 시도는 환영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투자를 이끌어낸 우스마노프가 1987년에 만든 회사 이름은 "Agroplast", 주생산품은 비닐 봉지였습니다.

 

당시 소련은 비닐 봉지의 수요가 폭발하던 시기였기에 2년 만에 Agroplast 매출은 백만불을 돌파하며 모스크바 주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죠. 허나 우스마노프는 동업자들에게 다른 사업을 시도하겠다 선언합니다. 지금 봉지 사업이 잘 되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깜짝 놀라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우스마노프. 그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업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80년대 말 소련에는 국가에서 제조하는 담배 "Smokey"와 "Accept" 두 종류만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우스마노프는 이런 상황을 기회라 보고 미국에서 "마그나"를 싸게 수입해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 역시 대박을 치면서 우스마노프의 회사는 연 300% 이상의 고성장을 거듭하며 많은 이익을 안겨 줍니다.

 

동업자
안드레이 스코치, 포브스 기준 $4.2 billion 재산으로 러시아 28위 전세계 255위 부자. 레브 크베트노이, 재산 $1.8 billion 러시아 49위 전 세계 719위 부자. 훗날 우스마노프와 함께 "Metalloinvest"를 탄생시키는 핵심 동업자 둘을 만난 것이 이즈음이었습니다.

 

당시 스코치와 크베트노이 둘은 석유를 사서 정유소에 맡긴 후 생산된 가솔린을 몇몇 주요소를 통해 판매하는 소규모 사업가였죠. 충분한 석유를 구하지 못했던 스코치에게 친구 중 하나가 이렇게 조언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우스마노프 씨에게 가봐.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야. 우리 같은 사업가들이 접할 수 없는 고위층 인맥도 풍부한 분이지." 비록 우스마노프가 석유를 구해다 주진 못했지만 스코치와 우스마노프 둘은 금새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일년 뒤 담배 사업에 잠시 현금유동성이 악화되자 이번에는 우스마노프가 스코치를 찾았습니다. 스코치는 급히 $ 14 million 을 마련해 빌려주었고 이를 단기 국채와 각종 유가증권에 투자한 우스마노프는 넉 달 뒤 $ 40 million 을 만들어 빚도 갚고 돈도 벌었죠. 우스마노프의 금융 능력에 강한 인상을 받은 스코치와 크베트노이는 친구가 아니라 동업자가 되어 같이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나? 사실 이 시기 우스마노프는 담배 사업을 하면서 틈틈히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연방 파이낸스 아카데미에서 뱅킹을 전공하고 있었습니다. 우스마노프는 말합니다. "당시 러시아에는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라 내 곳곳에서 자본의 흐름이 발생하고 있었지. 금융 사업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어." 하여 가솔린 팔던 스코치와 크베트노이가 돈을 대고, 담배 팔면서 뱅킹을 공부한 우스마노프는 자신의 돈과 지식을 활용해 투자전문회사 "Interfin" 을 창업합니다.

 

처음에는 MAPO-Bank 에서 Interfin 에 사업자금을 투자했습니다. 우스마노프는 이렇게 유치된 자본금을 가지고 국채와 유가증권에 투자했죠. 시장에서 실패를 모르는 우스마노프의 투자금은 나날히 규모가 커졌습니다. 급기야 창업 단 2년 만에 우스마노프, 스모치, 크베트노이는 자기들에게 투자하던 MAPO-Bank 를 MBO 방식으로 인수해 버리는 지경까지 성장합니다.

 

스코치는 말합니다. Interfin은 다른 러시아 사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국가재산의 사유화에 뛰어들지 않았다고. 우스마노프는 말합니다. "사실 사유화 행진에 뛰어들 필요가 없었어. 시장에는 저평가된 자산들이 워낙 많았기에 조금만 노력한다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지." 실제로 그랬습니다. 1900년대 중반 Interfin의 주된 투자는 유통시장(secondary market)을 통해 이루어졌거든요. 훗날 Metalloinvest 의 일부가 되는 Oskol Electric Metallurgical Plant (OEMK) 지분 40% 역시 이 시기에 인수되었습니다. 훗날 철강에 집중하고자 LUKoil에 매각하게 되는 석유저장회사 "Arkhangelskgeoldobycha "(AGD) 지분 51%도 이 시기에 Interfin 소유가 되었죠.

 

가즈프롬
우스마노프가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영기업 가즈프롬과 인연을 맺게 된 건 1998년이었습니다. 당시 렘 뱌히레프 사장 이하 가즈프롬 운영진은 해외에서 투자를 받아 가즈프롬 이름으로 자산 운용을 해볼 생각이었는데, 이 일에 함께 할 인물로 Interfin 에서 성공적인 자산 운용 능력을 선보인 우스마노프를 꼽은 것이지요. 우스마노프는 런던에 건너가 러시아에 관심있는 투자자를 찾았습니다. 정치적인 리스크가 높은 러시아에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우스마노프에게도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회계사 출신으로 딜로이트에서 일하다 "Middlesex Holdings plc" 이라는 회사를 차렸던 이란계 영국인 파르하드 모쉬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CIS 국가들에서 알루미늄과 석유를 수입하던 Middlesex Holdings plc 였기에 둘은 얘기가 잘 통했고 금새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1998년 말 경영난에 빠진 가즈프롬 상황 때문에 해외 투자 유치 프로젝트는 금새 종료되고 말았지만 우스마노프는 가즈프롬 운영진들에게 이런저런 사업 제안을 던졌습니다. 당시 우스마노프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가즈프롬이 철강 사업을 전개하면서 사업상 이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가즈프롬이 소비에트 지역 내에 송유관 라인들 운영을 직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즈프롬 운영진들 역시 우스마노프의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먼저 가즈프롬은 철강회사 OEMK를 보유하고 있던 우스마노프의 회사 Interfin 지분 20%를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우스마노프를 가즈프롬 자회사인 가즈프롬인베스트홀딩(Gazprominvestholding) CEO로 임명해 주장했던 사업구상을 실천하도록 했죠. 이때가 2000년이었습니다. 가즈프롬과 인해관계를 같이 하게 된 우스마노프는 2001년에 OEMK 지분을 추가로 매입하는가 하면 러시아 최대 철광석 채굴 회사 Lebedinsky GOK (GOK) 지분을 57% 인수했습니다. 또한 가즈프롬 이름으로 서유럽 은행들로부터 펀딩을 이끌어내기에 이르렀죠.

 

우스마노프와 함께 Interfin 을 경영하던 두 동업자도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안드레이 스코치는 러시아 하원 격인 듀마에 진출해 우스마노프 사업에 유리한 법안들을 입안해 나갔습니다. 한편 레브 크베트노이는 Interfin에 남아 우스마노프가 가즈프롬인베스트홀딩을 통해 철강회사 지분을 사들일 때마다 Interfin 명의로 같은 회사 지분을 사들였습니다.

 

알렉세이 밀레르 가즈프롬
2000년 초반은 러시아에 거대한 권력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보리스 옐친이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푸틴이 3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지요. 변화의 바람은 가즈프롬에도 불어왔습니다.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대외관계위원회 출신으로 러시아 에너지부 차관 자리에 있던 알렉세이 밀레르에게 경영난에 처한 가즈프롬을 살려내라는 특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렘 뱌히레프 사장 아래서 가즈프롬은 1999년부터 경영난에 빠져 자외사를 매각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스마노프를 가즈프롬 경영진에 영입했던 당사자들이 모조리 교체된 상황.

 

그러나 우스마노프는 가즈프롬 운영진 숙청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즈프롬인베스트홀딩을 통해 뱌히레프 사장 시절 가즈프롬이 외부에 매각했던 자산들을 회복시키라는 새로운 임무까지 맡았습니다. 당시 국영기업 가즈프롬의 주요자산들은 주로 뱌히레프 전 사장의 측근들 손에 넘어가 사유화되어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들이 푸틴이 임명한 가즈프롬의 새 운영진들을 전혀 신뢰하지 못해 우스마노프하고만 거래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푸틴 사람들에게 자산을 재매각했다가 돈 한 푼 받지 못할 거라 걱정하는 이들에게 우스마노프는 "걱정하지 마시라, 내가 사고 돈도 내가 지불한다." 며 달랬다는 설이죠.

 

진실이 무엇이든 우스마노프는 일을 상당히 잘 해냅니다. 사실 자산 매입/매각은 Interfin 시절부터 우스마노프의 전공이기도 했죠. 가즈프롬 산하 엔지니어링/건설 회사였던 "Stroytransgaz", 석유회사 "Sibur", 천연가스생산기업 "Severneftegazprom", "Zapsibgazprom" 등의 전부 혹은 지분 일부가 가즈프롬인베스트홀딩을 통해 다시 가즈프롬의 자산이 됩니다. 가즈프롬과 우스마노프의 관계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해 초 가즈프롬인베스트홀딩은 CEO 우스마노프와 2015년 까지 재계약한다고 발표했었죠.

 

포브스 기준 러시아 1위 부자로 랭크된 그가 왜 지금도 국영기업 가즈프롬의 자회사 CEO로 경영 일을 계속 하는 걸까요? 사실 우스마노프 입장에서도 전혀 손해보는 일은 아닙니다. 가즈프롬은 한 때 러시아 GDP 10%를 차지한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거대 국영기업입니다. 당연히 러시아 정부에서도 엄청 신경을 기울이는 회사란 뜻이지요. 특히 가즈프롬인베스트홀딩의 화려한 업적을 통해 당시 가즈프롬 이사회 의장에 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2008년 제 5대 러시아 대통령이 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건 우스마노프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너스였습니다.

 

Metalloinvest
2006년 러시아 언론에 합병 기사가 하나 납니다. 광산 회사 "Mikhailovsky GOK"와 철강 회사 "Ural Steel"을 보유한 바실리 아니시모프의 회사 "Metalloinvest"가 철광석 채굴 회사 "Lebedinsky GOK"와 철강 회사 "OEMK"를 보유한 "Gazmetall"에 인수합병된다는 내용이었죠.

 

"Gazmetall"은 가즈프롬과 우스마노프의 "Interfin"이 각각 보유하고 있던 OEMK와 GOK 지분을 합쳐 2000년에 세워진 회사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스마노프가 가즈프롬도 철강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만들어진 회사였고 그렇기에 이름도 가즈메탈로 지어졌습니다. 허나 새로 부임한 알렉세이 밀레르 회장은 철강 사업이 가즈프롬의 핵심 사업이 아니라 생각했고 이에 가즈프롬이 보유하고 있던 Gazmetall 지분을 모두 우스마노프 측에 매각했습니다. 그러니 2006년에 인수합병을 통해 재탄생한 가즈메탈은 온전히 우스마노프 측의 소유였죠.

 

2008년 가즈메탈은 사명을 "Metalloinvest"로 바꿔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데 바로 이 "Metalloinvest"가 우스마노프 재산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스마노프가 지분 45%, 오랜 동업자 안드레이 스코치가 30%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지분은 "Mikhailovsky GOK"를 소유했던 바실리 아니시모프가 가지고 있다가 2011년 12월에 다른 사업 빚갚느라 $ 2.5 billion 가격으로 매각해 VTB 은행 소유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5%는 가즈프롬인베스트홀딩 시절부터 동업자 관계가 된 파르하드 모쉬리 몫입니다.

 

레브 크베트노이는 어디로 갔냐구요? 크베트노이는 우스마노프가 인수합병 과정에서 부족한 자금을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은행에서 대규모로 돈을 융통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겨 "이렇게 하면 파산이다"라고 주장하며 가즈메탈 내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동업자 관계를 청산하였답니다. 허나 2000년대 중반 전세계적으로 철광석 가격이 급등하면서 철강기업들이 급부상했고, 덕분에 "Metalloinvest" 인수합병 시 빌린 돈을 모두 갚고도 남을 만큼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었죠.

 

쇼핑
철강 사업을 통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현금을 손에 쥐게 된 우스마노프는 남는 이익금들을 다른 업종에 투자하기 시작합니다.

 

주간지를 출판하는 "Kommersant"를 2006년 9월에 인수했고 연말에는 스포츠 TV채널 7TV를 인수합니다. 음악 채널 "Muz-TV"를 2007년에 인수했고, 2007년 8월에는 파르하드 모쉬리와 함께 "Red and White Holding"을 세워 런던 소재 축구 클럽 아스날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하죠.

 

2008년에는 러시아 거대 통신회사 "MegaFon" 지분을 31.1% 인수하게 됩니다. MegaFon은 2012년 12월 1일 기준 가입자가 6천 4백 만명에 달하는 거대 통신회사로 GSM, LTE 등의 통신 사업, 브로드밴드 인터넷 사업, 케이블 TV 사업 등을 운영하고 있죠. 이 당시 인수 가격만 최소 $ 5 billion 정도 된다고 추정되었습니다. 이후 우스마노프는 MegaFon 지분을 점점 늘려나가 2012년 11월 현재 50% + 1 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2012년 11월 말 런던주식시장에 $ 12.4 billion 규모 IPO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기에 내년에 우스마토프 재산 총액이 더 늘어나는데 큰 보탬이 될 거라 예상하네요.

 

IT
2000년대 초반 불어온 닷컴 기업 열풍에 동참해 온라인 기업들에 투자했다가 손해만 입었던 우스마노프는 다시 한 번 IT 기업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지난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스마노프는 IPO를 앞두고 있는 알짜 기업을 노리기로 하죠. 눈에 들어온 건 러시아 최대 포탈 사이트 "Mail.ru" 였습니다. 와튼 스쿨을 졸업한 미국 유학파 창업주 유리 밀네르와 인연을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2008년에 기회가 왔습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인터넷 사업을 국가에서 전략적으로 키워야 할 자산으로 보았고 "Mail.ru" 같은 거대 포털이 미국 자본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때마침 설비 투자에 돈이 필요했던 유리 밀네르는 우스마노프와 같은 러시아 재벌의 제안을 보고 잘되었다 생각한 것입니다.

 

밀네르는 "Mail.ru"의 지주회사 DST(Digital Sky Technologies) 지분 30%를 우스마노프에게 매각하며 투자금을 유치했습니다. 마침내 닷컴 기업에 대한 우스마노프의 열망이 채워지는 순간이었죠. 게다가 유리 밀네르는 미국 유학파 답게 미국 IT 업계와도 많은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9년 밀네르는 페이스북 창업주 주커버그를 만나 투자를 제안하고 DST를 통해 페이스북 지분 1.96%를 인수합니다. (2010년에 페이스북 지분을 추가 인수해 10% 가량 보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밀네르의 DST는 소셜 게임 서비스 징가, 소셜 커머스 그루폰, SNS 대명사 트위터 등에도 투자를 계속했습니다. 덕분에 DST에 지분을 투자한 우스마노프 역시 이들 미국 IT 기업 지분을 보유한 셈이 되었죠.

 

IPO를 앞둔 알짜기업에 대해 투자한다는 우스마노프의 전략은 성공했습니다. 2010년 11월 Mail.ru 그룹이 런던주식시장에 IPO, 2012년 5월에는 페이스북이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이들 기업 지분을 보유한 우스마노프의 재산 규모도 급상승하게 되었죠. 포브스 기준 우스마노프의 재산은 2010년 초에 $7.2 billion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2012년 현재는 $ 18.1 billion 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처럼 우스마노프 재산이 급격히 상승한 데에는 미국 닷컴 기업들 다수의 지분을 보유한 DST, 그리고 2010년에 IPO를 한 Mail.ru 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DST는 트위터 지분도 5% 이상 보유하고 있으니 가까운 시일에 트위터가 IPO를 한다면 이 역시 우스마노프 재산이 느는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혹자는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은 자신이 익숙한 분야에 대해서만 사업을 벌이고 투자하기 때문에 성장 잠재력을 스스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스마노프는 이와 대조적으로 상당히 유연하다 평가하기도 합니다.

 

우스마노프가 아스날 지분을 인수해 나갈 2007년 당시 잉글랜드 언론들은 그를 2003년에 첼시를 인수한 로만 아브라모비치에 비교하곤 했습니다. 우스마노프는 이런 비교에 대해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국영기업들을 사유화할 때 이를 싼 값에 불하받아 사업을 한 로만과 나는 다르다. 나는 정부재산의 사유화에 동참하지 않고 내 스스로 돈을 번 사람이다."

 

이 포스팅이 그의 주장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만 마칩니다.


 

 

참고자료

포브스.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