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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의 거인들

순위표의 신 - 골득실과 승자승


필자: Yan11


 런던 올림픽 본선 조편성이 확정되면서 또다시 조별예선 통과를 위한 경우의 수가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축구를 비롯한 거의 모든 단체경기의 대회가 조별예선이라는 방식을 공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이상 1차 관문을 통과하는 데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기실 대회 운영의 측면에서 볼때 토너먼트와 리그는 축구의 양대 요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대 축구의 태동기부터 이 두 방식은 아주 자연스럽게 채용되어 지금까지 축구의 역사와 함께해오고 있는데, 이 두가지를 절충한 것이 조별예선(리그)+녹다운 토너먼트로 집약되는, 이른바 멀티-스테이지 토너먼트이다.


대체로 어떤 대회든 조별 예선을 거치고 나면 최초 출전팀의 절반에서 적게는 1/3 정도가 탈락하고, 나머지 팀들이 토너먼트 방식의 플레이-오프를 거쳐 승자를 결정하게 된다. 축구의 경우 조별 예선의 순위를 정하는 방식은 승점, 골득실차(다득점), 승자승 등이 있는데, 어떤 대회든 승점이 제 1의 순위 결정 요소이지만 대회에 따라 골득실과 승자승은 그 우선순위가 바뀌기도 한다. 


과거에는 지역을 막론하고 승점-골득실-승자승의 우선순위가 대세였던 반면 현재는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적용된다. 국제적으로 여전히 널리 통용되는 것이 골득실이지만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는 현재 승자승을 우선하고 있다. 


승점이 같은 동률팀들간의 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 골득실차를 우선하는 것은 축구가 골을 넣는 경기라는 기본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골차 승리보다 두골차, 세골차의 승리가 더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상대팀보다 많은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두번의 한골차 승리가 한번의 두골차 승리보다 우선하게 된다. 이는 조별 예선에서 함께 대진한 팀들과의 종합적 전적을 따지는 개념이 된다.


반면 승자승, 정확히는 '동률팀간 상대전적'을 우선하는 경우는 승점이 같은 팀들끼리만 비교해서 순위를 가리자는 것이다. 이 제도의 근본 목적은 사후 일어날지도 모를 골득실차를 조작하기 위한 담합을 막자는 데에 있다. 동률팀간의 전적도 동률일 경우(무승부)에는 자동적으로 골득실로 넘어가긴 하지만, 제 1의 기준을 해당 팀들간의 상대전적으로 보자는 의미이다.


지역별 대회별로 이 두가지 기준이 상이하게 적용되므로 제도의 취지와 다르게 피해(?)를 보는 팀도 역사상 여럿 존재했는데, 그 사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 한국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 대회에서 한국은 가나와 함께 1승 1무 1패로 승점 4를 기록했으나 다득점에서 가나(4-4)에 밀려 조 3위로 탈락했다. 한국은 1차전에서 가나를 1-0으로 이겼으므로, 동률팀간 상대전적에서는 가나에 앞서지만 대회 규정상 골득실-다득점-동률팀간 상대전적으로 순으로 순위를 매겼으므로 피해자가 된 셈이다.


* 이탈리아 - 유로 96


이탈리아는 체코와 1승 1무 1패로 동률을 이루고 골득실에서 0으로 체코(-1)보다 앞섰지만 이 대회가 동률팀간 상대전적을 우선하여 체코에 밀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선수권대회는 96년부터 동률팀간 상대전적을 우선하는 규정이 신설되어, 이탈리아가 그 첫번째 피해자가 되었다.


* 북아일랜드 - 유로 84 지역예선


이전 '유럽예선 잔혹사' 3편에서 밝혔던 대표적인 피해자가 북아일랜드다. 당시 북아일랜드는 서독과 5승 1무 2패, 승점 11로 동률을 이뤘고 상대전적에서는 두번 모두 이겼지만 골득실에서 +3으로, +10의 서독에 밀려 아깝게 조 2위로 탈락했다. 기실 조 1위를 두번 모두 이기고도 2위로 밀려나기가 매우 힘든데, 이런 사례는 북아일랜드가 거의 유일하다.


* 맨체스터 시티 - 2011-12 프리미어 리그


잉글랜드는 기본적으로 골득실을 승자승보다 우선시한다. 며칠전 리그 1,2위간의 대결에서 맨체스터 시티가 승리하면서 선두를 탈환했지만, 이는 골득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8골 앞섰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맨시티는 나머지 두경기를 모두 이겨도 리그 자력 우승을 확정할 수 없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맨유가 역시 두경기를 모두 이기고 맨시티보다 골득실에서 9골을 더 넣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승자승을 적용한다면 맨시티는 나머지 두경기를 이기기만 하면 무조건 우승이 된다. 과연 맨시티가 규정의 피해자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 라리가


2006-07 시즌 당시 리그 3연패에 도전하던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 세비야와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33라운드에서 레알이 세비야를 3-2로 격파하면서 세비야는 우승권에서 탈락하고, 막판 대결은 바르셀로나와 레알로 압축되었다. 승점 2점차의 리드를 지키던 바르셀로나는 35라운드 홈경기에서 레알 베티스의 하파엘 수비스에게 종료 직전 동점골을 내주며 1-1로 비긴 것이 치명타가 되었다. 전날 경기에서 레알이 후반 44분 터진 곤살로 이과인의 극적인 골로 에스파뇰에게 4-3으로 대역전승을 거두면서 양팀은 승점에서 동률이 되었지만 상대전적에서 1승 1무로 앞선 레알이 선두로 뛰어오른다. 남아있던 4경기에서 바르셀로나는 모두 이기고 레알이 한번 정도 이기지 못해야 우승이 가능했다. 37라운드에서 레알이 사라고사와 2-2로 비기면서 바르셀로나는 찬스를 잡았지만, 지역 라이벌 에스파뇰과의 홈경기에서 역시 추가시간에 라울 타무도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얻어맞고 2-2로 비겨 우승은 멀어져 버렸다. 


최종 38라운드에서는 양팀 모두 이겨, 레알은 23승 7무 8패, 바르셀로나는 22승 10무 6패로 공히 승점 76점을 기록했지만 상대전적에서 앞선 레알이 우승을 차지한다. 바르셀로나는 막판 아틀레티코 원정에서 6-0으로 대승하는등 골득실에서 +45로 +26에 불과했던 레알에게 크게 앞서고도 우승컵을 넘겨줘야만 했다. 


1928년 라리가 출범 이후 우승팀과 준우승팀의 승점이 같았던 것은 2006-07시즌을 포함해 총 8회 있었고, 이중 다른 기준을 적용했을 때 우승팀이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5회였다.



- 1946-47 시즌에 발렌시아(16승 2무 8패, 득실차 +20)와 아틀레틱 빌바오(15승 4무 7패, 득실차 +34)가 승점 34로 동률이었지만 양자 대결에서 두번 모두 발렌시아가 1-0으로 승리, 득실차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 1959-60 시즌엔 바르셀로나(22승 2무 6패, 득실차 +58), 레알 마드리드(21승 4무 5패, 득실차 +56)가 나란히 승점 46을 마크했다. 상대 전적에서는 바르셀로나가 3-1로, 레알이 2-0으로 각각 자신들의 홈에서 이겼다. 레알 입장에선 아쉬운 것이, 원정경기 다득점 원칙이 이당시엔 적용되지 않아, 양팀간 전적은 3-3 동률로 처리되어 골득실에서 앞선 바르셀로나가 우승한다. 


- 1970-71 시즌엔 발렌시아(18승 7무 5패, 득실차 +22)와 바르셀로나(19승 5무 6패, 득실차 +28)가 모두 승점 43이었다. 바르셀로나는 원정 경기에서 발렌시아와 1-1로 비겼지만 홈에서 0-2로 완패하는 바람에 분루를 삼켰고, 발렌시아가 우승컵을 쟁취한다.


- 1980-81 시즌엔 레알 소시에다드(19승 7무 8패, 득실차 +23), 레알 마드리드(20승 5무 9패, 득실차 +29)가 승점 45로 동률을 이뤄 상대전적(1승 1패, 3-2)에서 앞선 소시에다드가 행운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외에 1930-31, 1983-84, 1993-94 시즌에도 우승팀과 준우승팀의 승점이 같아 동률팀간 상대전적을 적용해 우승을 가려냈지만 이 때에는 우승팀이 골득실차도 가장 높았다.




* 1994 미국 월드컵 E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4자동률이 발생한 경우다. 멕시코, 아일랜드, 이탈리아, 노르웨이가 모두 물고 물려 네팀 모두 1승 1무 1패를 기록한, 4팀 한조의 리그에서 4자 동률이 발생할 수 있는 유이한 경우였다(다른 하나는 네팀 모두 3무승부를 기록하는 경우). 이리 되면 동률팀간 전적이 의미가 없어진다. 네팀의 전적을 보면,





득실차는 모두 0이므로, 다득점으로 순위를 매겼다. 여기에서도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가 동률이 되므로 또 이 두팀간의 상대전적을 따져서, 1-0으로 승리한 아일랜드가 이탈리아보다 높은 순위에 가게 된다. 만약에, 이 네팀이 다득점도 같았을 경우에는 추첨을 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득실차와 승자승이라는 '순위표의 신'은 역사상 여러 팀들을 울고 웃게 했는데, 과연 이 '순위표의 신'의 희생자들은 규정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경쟁상대보다 많은 승점을 얻지 못한 자신들을 탓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