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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의 거인들

유럽 지역예선 잔혹사 -3


필자: Yan11





 * 가장 위대했던 조 2위,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4개 협회 중 하나로, 흔히 '얼스터'라고도 불리는 곳이며 독립문제로 인해 영국에게는 정치적으로 오랜 기간 골칫거리였다. 오늘날 한국 축구팬들은 물론, 유럽 축구팬들 중에서도 북아일랜드를 강호로 보지는 않고 있지만, 축구 역사상 월드컵에 나서보지 못한 선수들 중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비운의 스타' 조지 베스트를 배출한 곳답게 그 저력만은 무시할 수 없는 팀이다. 

이런 북아일랜드도 한때 유럽 축구계에서 강호로 대접받았던 적이 있다. 바로 19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였다. 24년 만의 본선 무대였던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주최국 스페인과 동유럽의 강호 유고슬라비아를 따돌리고 2차 리그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던 이들은, 역대 월드컵 본선 최연소 출장자인 노먼 휘트사이드(당시 17세 1개월)를 배출하기도 했다. 2차 리그에서 프랑스에 패해 아쉽게 4강에 들지는 못했지만, 5경기를 모두 소화한 휘트사이드의 존재와 더불어 북아일랜드는 유럽 축구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북아일랜드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도 올랐지만, 필자가 더욱 주목하는 부분은 유로 84 지역예선전이다. 6조에 속했던 북아일랜드는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터키, 그리고 월드컵 결승진출팀이자 대회 2연패를 노리던 서독과 대결해야 했다. 당시에는 각 조 1위 팀만이 본선에 오를 수 있었으므로, 모두가 서독이나 오스트리아의 본선행을 점쳤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0-2로 완패한 오스트리아 원정으로부터 시작된 북아일랜드의 출발은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명장 빌리 뱅햄이 이끄는 북아일랜드는 이어 벌어진 서독과의 홈경기에서 스트라이커 이안 스튜어트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 다시 한번 유럽을 놀라게 한 뒤, 터키와 알바니아를 연파하고 오스트리아에게도 홈경기에서 3-1로 완벽히 설욕, 점점 본선행 가능성을 높여갔다. 

1983년 11월 16일, 함부르크에서 서독과의 원정 최종전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북아일랜드는 4승 1무 2패로 승점 9, 서독은 4승 1무 1패로 역시 승점 9였다. 북아일랜드로서는 원정 경기라는 부담감 속에서 어렵지만 무조건 서독을 이겨야 했다. 특유의 끈끈한 수비와 조직력으로 루메니게와 마테우스를 앞세운 서독의 공세를 차단해내던 북아일랜드는 후반 5분 만에, 휘트사이드가 기습적인 선취골을 성공시켜 승기를 잡았다. 단 한 명의 교체도 없이 선발 멤버 11명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이 한 골을 지켜냈고, 처음으로 조 1위를 탈환한다. 6만여 서독 관중의 홈팀에 대한 일방적인 성원을 이겨낸 승리라 더욱 값졌다. 

승점 2점차로 조 1위에 오르긴 했지만 골득실에서 서독에 크게 뒤졌기 때문에 북아일랜드는 서독이 마지막 경기에서 알바니아에게 이기지 못해야 본선 티켓을 따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알바니아는 전력상 약체로 평가되면서도 심심치 않게 강호들을 괴롭히는 팀컬러를 갖고 있었으므로 북아일랜드의 기대는 작지 않았다. 알바니아가 예상을 뒤엎고 젠취 토모리가 선제골을 잡아냈지만 곧바로 이어진 서독의 반격에서 루메니게가 동점골을 터뜨려 스코어는 1-1. 원정 경기였음에도 알바니아는 의외로 후반 막판까지 잘 버텨내며 북아일랜드 팬들의 기대를 높여줬다. 그러나 종료 10분 전, 결국 서독 수비수 게르하르트 슈트라크가 결승골을 터뜨려 북아일랜드의 꿈은 한순간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서독과 북아일랜드는 나란히 5승 1무 2패를 기록했지만 골득실에서 서독이 +10, 북아일랜드는 +3으로 서독이 조 1위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에는 유럽선수권대회에서도 승자 승보다 다득점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서독이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북아일랜드는 조 1위 팀을 두 번 모두 격파하고도 본선 티켓을 따내지 못하는 지독한 불운을 맛봐야 했고, 반면 서독은 부끄러운 본선 진출이었기 때문인지 본선 대회 조별 리그에서 스페인에게 패해 탈락하는 망신을 당한다. 

참고로 살펴보면 북아일랜드는 당시의 아쉬움 때문인지 1997년 8월 20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1-3으로 패할 때까지 20년간 대 서독(독일)전 무패행진(2승 3무)을 이어갔다. 86월드컵 이후 북아일랜드의 전력이 급전직하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기록이다. 이들은 아직 유럽선수권대회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고, 월드컵에서도 1986년 이후 사라진 상태다.



본문은 필자가 2007년 12월 1일 축구공화국 재직 시절 쓴 글을 보완 편집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