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홍차도둑
리버풀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이라면 리버풀 때문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THE KOP이라는 근대 서포터의 시작점이 리버풀이었다면 그 이후 1980년대 뉴스를 도배한 '축구팬 폭력'의 큰 사고를 안긴 곳이 리버풀 팬들이기도 하다.
헤이젤의 비극으로 인해 축구팬 들 중에서 난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존재함을 확실히 증명하게 된 영국 정부는 파가 두 파로 갈려버렸다. 전통적인 축구장에서의 응원을 통제하기는 힘들다는 부분과 함께 그래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믿어보자는 파와 강경진압을 요구하던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터져버린 것이 힐스보로 참사였다
힐스보로 참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놓은 문서는 한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기 어렵다.
한국의 서포터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90년대 후반의 PC통신의 축구동호회에서 조금 요약한 글이 있었으나 지금은 되려 추모식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사태를 제대로 설명한 글은 찾기 어렵다.
나도 검색해보니 겨우 몇개 나오더라...수많은 힐스보로 이야기의 대부분은 몇주년 기념식이라는 것과 리버풀의 스타 스티브 제라드의 친척이 이때 죽었다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실제 상황을 풀어 써 준 글을 찾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축구카페에 쓰면서 외부 검색을 막아서 많이 검색되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너무나 숫자가 적다. 그만큼 이 사고가 잉글랜드 축구에 얼마나 영향을 끼친 것인지. 세계 축구문화에 얼마나 영향을 끼친 것인지 한국의 축구팬들에겐 덜 다가온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왕 쓰는 김에 좀 더 써봐야겠다고.
사실...힐스보로 참사는 단순히 축구장의 '폭력을 동원하는 훌리건'들이 일으킨'폭력사고'라고 보긴 조금은 곤란한 부분이 있다.
헤이젤 참사와 힐스보로 참사는 비슷한 점이라면 '낡은 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벌어진 사건 이었다는 점이긴 했다.
이 때문에 영국정부를 비롯해서 FIFA는 '경기장의 구성 정의'를 새롭게 매기게 된다. 이 부분은 이야기하면서 설명할 것이다.
헤이젤 이후 과연 잉글랜드는 어떤 절차를 겪었을까? 그리고 왜 힐스보로가 문제가 될 것일까? 왜 우리는 힐스보로를 주목해야 하는 걸까?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제 그 이유를 풀어보자. 그러기에 헤이젤 참사를 다시금 봐야 한다.
이전 글에서 헤이젤 사건에서 이미 the KOP과 유벤투스의 울트라스들이 한판 뜨기까지 했다고 했다. 헤이젤 참사를 표현한 글에서 몇몇 당시 증인들은 이런 표현을 한다.
"도대체 왜 그 경기장에서 그런 큰 경기를 배정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당시 헤이젤 경기장은 만들어 진 지 오래되었다. 시설도 낡았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써포터들을 남북으로 가르지도 않았다. 한쪽 방향의 스텐드(본부석 반대방향이었을거다)에 배치하고 그냥 펜스만 설치한 것이다.
그 결과는?
이미 경기장 밖에서 한판 붙은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팬들은 투척전을 벌이고 있었다.
도발의 시작은 리버풀이었다.
당시 리버풀 팬들의 경기 전 응원특징중 하나는 상대 응원단에게 '돌격! 앞으로!'를 하는 것이었다...이건 그냥 위협적으로만 하는 일종의 '질주'였고 그냥 질주만 하고 끝나고 위해를 가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냥 '젊은 친구들의 혈기'로 치부되는 것이었고 잉글랜드 축구장의 '한 문화'로서 잡혀있던지라 봐주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지만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팬들끼리의 충돌은 일상화 되고 있었다.
이른바 '저것들에겐 지지 말자!'는 것 때문에 이러한 질주는 점점 규모가 더 커져가는 그런 것으로 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잉글랜드에서 경기 전에 이렇게 '세과시'를 하다가 폭력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일상화 되어 있었다.
다만 다치는 사람이 많이 나오거나 경찰과의 대치 정도까지 가는 사건이 아니면 크게 언론화 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그런 응원방식에 대한 경험이 없던 유벤투스 울트라스들에겐 리버풀 팬들의 '돌진'은 위협을 넘어선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피하려고 했지만 유벤투스의 젋은 팬들은 리버풀 팬들과 맞섰고 그 결과가 '이미 경기 시작전부터 헤이젤 시 안에서 한판 뜨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게 정리되지 못한 채로 경기장에서도 계속 폭력행위가 계속되었다. 지금처럼 아예 골대쪽으로 '완전 분리'시킨 것이 아니었다. 리버풀 팬들은 그 가로막는 펜스도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계속되는 폭력행사...헤이젤의 비극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당시 로이터에서 배포된 '헤이젤'의 사진, 다급함과 공포, 그리고 혼란...헤이젤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고 이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축구장에서 일어난 생생한 폭력이...저 사진 어디에 '팀에대한 애정'과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있단 말인가?]
당시 동영상을 구해 보실 수 있는 분들이라면 보라. 결승전이다보니 TV중계가 있었다. 때문에 리버풀 팬들의 유벤투스 팬들을 폭행하는 장면도 찍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낡은 헤이젤 경기장의 한켠이 이러한 사람들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렸다. 거기에 그 아래에 있던 관중들은 경기장 벽이 무너진 파편에 깔렸다. 사상자가 나와버린 것이다. 결승전이라는 흥미진진한 경기를 보러 온 양팀 팬들도 아닌 일반관중들이 쓰러져 나갔다. 써포터간의 충돌에서 그냥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TV로 유럽 곳곳에 생중계가 되어버린...축구경기의 중계가 아니라 팬들의 폭력행사의 아수라장을 생생하게 중계해 버린 셈이 된 것이다.
이게 헤이젤 경기장의 비극이었다.
그렇게 낡은 경기장에서 이미 경기장에 이러한 위험이 예상되고 있었음에도 영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고 UEFA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나마 벨기에 경찰은 경기 전 팬들의 이런 충돌을 보고받고 경기장에 인원을 급파했지만 때는 늦었다. 그나마 현장에서 리버풀 팬들을 바로 연행했고 29명을 구속시킨 것에 그쳤을 뿐이었다.
이 사고로 인해 잉글랜드 문화가 바뀌었는가?
문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이 사태 때문에 잉글랜드는 5년간 UEFA대회에 참가 금지가 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의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단순한 군중 소요와 폭력행위로만 보고 경찰 투입뒤의 강경진압외에는 딱히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온 의견은 '알콜 반입 금지' 정도에 '관중석의 완전 지정석과 지정번호에만 관중을 앉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지정석을 이야기 했던 당시 대처 수상은 언론에게 그야말로 '까였다,'
여자가 무슨 축구를 아냐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영국인의 즐거움을 외국인들의 압력으로 인해 포기하려 하는 매국년이라는 이야기까지...
그런 상황에서 누가 효과적인 대책을 내 놓을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무대책이 대책이었다. 서포터들 안에서도 잉글랜드 서포터협회가 만들어 지는 등 '자정노력'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런 흐름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힐스보로 참사'이였다.
힐스보로 참사는 전통적인 잉글랜드의 축구문화를 일거에 뒤바꾸는 일대 전환점이자 비극이었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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