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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셋풋볼

영화 '코리아'를 보고. (부제: 최초의 단일팀 시도 그리고 북한의 몰락)

                                                                                                               글쓴이: 바셋

 

여신 하지원이 나오는 ‘코리아’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당시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같은 해 청소년 축구 ‘팀 코리아’의 선전도 있었기에 2개월 간격으로 감동의 원투 펀치가 작렬합니다.

세계의 스포츠 인문학자들에게 한반도는 대단히 중요한 관심대상입니다. 스포츠가 가지는 사회 통합기능의 극대화된 예를 구현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지요. 불행히 한반도 남북의 두 정치 집단은 그 극대화된 예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대회 직후 양국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 상대편의 문제점을 떠들었고, 우리 편 칭송하기에 매진합니다.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팀 코리아’가 결성된 적이 없었지요.

 

‘팀 코리아’ 불발의 책임을 정치, 외교에만 물을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외교에선 호혜평등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묻어간다는 인상을 주면 단일팀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양쪽이 실력이 비슷해야하겠지요. 1991년 두 종목은 이 요건을 만족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다시 30년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도 ‘팀 코리아’가 만들어질 필요성 나아가 절호의 기회를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묘하게도 남북한 축구는 시종일관 엇박자로 놀았습니다. 안 만나는 게 상책이었기에 줄행랑을 놓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길 서슴지 않습니다. 누가 같은 민족 아니랄 까봐 둘이 아주 쌍으로 똑같이 놀았습니다. 시작은 한국이었지요. 그 결정적 계기가 64년 동경 올림픽이었고, 이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후 북한 스포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한국 전쟁 직후 한창 세를 확장하던 IOC는 북조선 괴뢰국을 가입시키고 싶었습니다. 다만 유엔이 지정한 한반도의 성골 대한민국이 반대하니 눈치만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승만 독재의 온갖 또라이 짓에 세계적 분위기가 오히려 친북쪽으로 기울자 IOC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IOC 회원국이 됩니다. 당시 북한 반대 운동을 책임진 한국 IOC 위원은 어째 그 이름만으로도 믿음이 안 가는 이기붕이었습니다.

 

개최국 일본의 본선 자동 진출로 아시아 지역 예선을 낙관하던 한국 축구계는 초긴장 모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우 분단 10년을 갓 넘긴 시점. 북한의 축구 실력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다행히 예선 일정이 3개조 조별리그 각조 1위 본선진출로 짜였고 남북은 사이좋게 A, B조 1위를 거머쥐며 본선행을 확정합니다. C조 1위는 이란.

 

원래 북한축구는 IOC 가입유무와 상관없이 올림픽에 나갈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아시아 지역 예선을 주관하던 AFC가 여전히 김일성을 괴뢰국 우두머리로 봐줬던 덕인데... IOC 절친 FIFA가 곧바로 북한을 승인하니 AFC는 찌그러집니다. 그리운 이름 차경복 감독님이 대표팀 선수로 뛰실 적 이야기입니다.

 

지역 예선이 한창이던 시점에도 한국과 IOC의 전쟁은 진행 중이었습니다. 한국이 계속 악을 쓰며 물고 늘어지자 IOC가 결정적 제안을 날립니다.

 

“너희들 주장대로 북한이 한국의 일부라면 북한과 함께 참가해라!!”

 

설마 했던 북한이 덜컥 동의를 합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참가 논의는 양측 스포츠인들의 열망이 이념 위에 군림하며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문제는 축구였습니다. 개인 종목들과 달리 팀스포츠 축구는 ‘팀 코리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배구도 본선에 진출하지만 수준차가 있어 한국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요.

 

만약 코리아 단일 축구팀이 이 대회에 참가했더라면 한국 축구사 치욕의 한순간이 지워졌을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한국 측의 국호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 국기 태극기 고집으로 결국 단일팀 협상이 깨졌고, 남북은 각각 따로 동경에 날아가게 됩니다. 결과 체코슬 1-6, 브라질 0-4, 아랍공 0-10.

 

북한 축구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강했습니다. 대회 전 열린 가네포 대회 결승에서 북한이 아랍공화국과 비기자 한국은 아랍공화국의 전력을 우리와 비슷하다 착각합니다. 착각은 자유, 망상은 해수욕장.

 

다만 아쉽게도 북한은 그 가공할 전력을 동경 올림픽에서 보여주지 못하고 2년 뒤 잉글랜드 월드컵으로 미룹니다. 앞에 언급한 북한 스포츠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버린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지요.

 

한국을 갈아 마신 아랍공이 북한과 비겼다고 소개한 가네포 대회(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올림픽에 대항해 창설한 대회로 신생국, 사회주의 국가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참가하며 큰 호응을 받은 종합대회였습니다. 국제 스포츠와 차단되어 있던 북한에겐 그야말로 생명수같은 존재가 되어주었지요.

 

63년 초대 가네포 대회에서 아시아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스프린터 북한의 신금단이 200m, 400m, 800m 3관왕(세계신 2개) 위업을 세워버립니다. 북한이 온갖 굴욕을 감수하며 동경 올림픽에 가려했던 이유가 이 신금단 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국주의자 세계육상연맹이 이미 동경에 도착해있던 신금단을 제명해버리고 맙니다.

 

에이스를 뺐기고 화가 치민 북한은 천신만고 끝에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철수합니다. 이때부터 북한이 보인 스포츠 외교는 지나치게 정치적, 원론적이었고 당연히 패착의 연속이었습니다. IOC와 그의 친구들에 원펀치에 이내 나가리가 되고 만 가네포는 아시아 지역 대회로 격하되었다가 이내 없어지고 마는데 북한은 ‘정치적 이념’에 충실한 나머지 중국도 버린 이 대회에 집요하리만큼 집착해 유치권을 따내기까지 합니다. 물론 참가한 나라는 없었지요.

 

알아서 국제 스포츠계 왕따의 길을 전력질주한 북한은 이후 올림픽만 세 번을 보이콧합니다. 결과는 참혹합니다. 축구만 놓고 봐도 몬트리올 올림픽 8강을 끝으로 아시아에서 마저 챌린저급으로 격하되고 맙니다.(남아공 본선 진출은 운입니다!!)

 

특정 스포츠 종목이 한 나라에서 오랜 기간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정치적, 상업적 위상이 모두 충족되어야 합니다. 근래 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사랑받는 이유도 이전에는 없었던 국제대회에서의 연속 선전으로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한 이유가 크다고 봅니다. 옛날엔 사실상 축구 혼자의 몫이었지요.

 

북한 축구는 상업적 부분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대실패를 거둔 케이스입니다. 축구를 남들 다한 체제 경쟁, 내부 단결의 도구로 조차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찐따들입니다. 과거 북한 축구의 위용 그리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부터 시작한 그들 여자축구의 주소를 생각할 때 무척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1991년 ‘코리아’의 전설을 떠올리다 단일팀 결성 실패, 북한 축구의 몰락 등이 겹으로 생각나 아쉬운 맘에 두서없이 적어 봤습니다. 한편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축구’는 그닥 훌륭한 소재가 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 도입기에 축구가 괄시받은 이유도 똑같았죠. 비루한 기술력으로는 경기의 긴장감을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TV 중계가 도입되면 공전의 히트를 한 종목이 권투였습니다. 고정 카메라 한 대만 있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 수 있으니까요.

 

사진출처 openingupnorth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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