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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셋풋볼

최강의 용병 트리오

                                                                                                                 글쓴이 : 바셋

브라질에 편중되어 있던 한국의 용병 수급 루트가 다시 다양해지고 있다며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브라질리안 없는 구단이 흔찮은 현실이며 부산 같은 경우 아예 브라질 트리오(모따, 파그너, 에덜로)에게 올인한 모냥입니다. 이렇듯 K리그에선 피 같은 용병 쿼터를 모두 브라질에게 할당한 팀들이 그간 적지 않았습니다만 그 중 한 넘 정도 꼭 찌질한 애가 섞여 있기 마련이었지요.

용병 3인을 모두 동일 국적 출신으로 채워 넣고 성공한 케이스를 생각해봅니다. 일단 한국에선 없었다고 기억하고 유럽 경우 가까운 과거, 꼭 축구팬이 아니어도 들어봤을 만한 드림 트리오가 구성된 적이 있었습니다.

월드컵 챔프 트리오.

70년대 이후 당최 기를 못 피고 지내던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당시 한창 유행이던 독일 용병 수급에 박차를 가합니다.

일차 타겟이 독일 최고의 스타 로타르 마테우스였습니다. 근데 영입 과정에서 넝쿨이 딸려 들어옵니다. 한국엔 이영표 이후 인재가 없다는 문제의 좌측면 전문가, 안드레아스 브레메!

두 바이에른 출신이 처음 인테르에서 호흡을 맞추던 1986년까지만해도 다른 하나의 용병 파트너는 독일인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대표팀 주전이자 피오렌티나에서 이탈리아 적응을 끝낸 라몬 디아스였습니다. 이 셋 덕분에 인테르는 오랜 암흑 시기를 청산하고 단박에 리그 우승을 거머쥡니다.

좋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테르는 계속해서 팀을 ‘독일화’하려했습니다. 그리하여 영입한 이가 유에파컵 준우승 팀 슈투트가르트에서 골폭풍을 일으키던 위르겐 클린스만이었습니다. 이 조합은 1990년 월드컵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으나 클럽 무대에선 허당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돌이켜볼 때 그나마 인테르가 그 정도 성적을 얻은 게 그들 덕분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1993년 트라파토니 감독을 비롯 삼인의 독일인이 떠나갔고 인테르는 최악의 나락에 쳐박히고 맙니다.

리그 우승에 유에파컵까지 챙긴 그때의 인테르가 저평가 되는 이유는 라이벌 AC밀란이 동시기 이룬 쨉도 안 되니 성적과 전력 덕이 큽니다. 그랬습니다. 같은 시기 밀란은 네덜란드산 튤립으로 꽃단장을 하고 온갖 똥폼을 다 잡고 있었습니다.

툴리파니

얼마 뒤면 깜빵가게 생긴 이탈리아의 변태 총리 베를루스코니가 밀란을 접수한 때가 1986년이었습니다. 이어 세계 클럽 축구사상 최강이었다 평가받는 팀이 결성되었지요.(전 오늘날의 바르샤보단 약하다고 봅니다만..) 선수로서는 거지같았지만 지도자로선 두각을 보이던 신임 사키 감독은 구단주의 돈질에 힘입어 네덜란드 PSV에게 사상 최고의 몸값을 주고 대걸레 머리 루드 굴리트를 데려옵니다. 그보다 조금 앞서 아약서로부터 마르코 반 바스텐을 집어오는데 이 선수는 매입단가가 굴리트의 10% 정도 밖에 안하던 싸구려였습니다. 비지떡이 부상으로 누워있는 사이 굴리트가 그 몫까지 너끈히 소화한 밀란은 곧바로 이탈리아 챔피언 자리를 챙깁니다.

그해 여름 네덜란드 선수들이 소련을 꿀리며 유럽챔피언을 따먹고 보무도 당당히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땐 걸레 머리가 한 명 더 끼어있었습니다. 현 사우디아리비아 감독님이신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합류. 밀란 사람들은 이들을 ‘세 송이 튤립’이라 미화합니다.

분명 무적의 팀이었습니다. 헌데 과연 이 화란인 셋이 동시에 폭발한 경기가 얼마나 되었는지에서 쬐꿈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걸레II’의 합류로 후방까지 든든해진 밀란은 유럽 챔스 등 트로피란 트로피를 닥치는 대로 챙겨갑니다. 그러나 분명 이땐 굴리트가 부상으로 버벅거리고 있을 시기입니다. 셋이 모두 잘했다고 볼 수 있는 다음해엔 마라도나가 독고다이로 버틴 나폴리에게 밀립니다.(아무리 생각해도 디에고 형은 조난 대단한 인간입니다.) 그래도 챔스는 챙겼고, 특히 결승에서 네덜란드 삼인방 모두가 절정의 경기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던 1991년 그러니까 사키 감독이 밀란에서 물러나는 시점을 기해 툴리파니는 빠르게 와해됩니다. 91/92 시즌 득점왕 반 바스텐의 저질 발목은 치유의 기미가 없었고, 특히 굴리트의 하향세가 눈에 띄며 불란서 사람 장 피에르 파팽에게 주전 자리를 뺐깁니다. 1993년 반 바스텐은 부상으로 은퇴를, 레이카르트는 고향 아약스행, 굴리트는 주전 경쟁이 원활한 삼프도리아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나중에 잠깐 밀란에 돌아오기도 하지요. 

네덜란드, 독일 트리오는 축구 명가 모국의 유니폼을 입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공교롭게 그 때 그 장소가 밀란과 인테르의 공동 홈구장 산시로였습니다. 절정의 기량을 보여준 클린스만 그리고 브레메의 골로 독일이 이겼고, 푈러와 레이카르트가 디럽게시리 침 뱉어가며 싸운 명승부는 아닌데 치열했던 경기였습니다.

그레노리

밀란이 동일 국적 외국인 세 명을 데려다 큰 재미를 본 경우는 이보다 40여년 앞선 시기에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 한국 축구 이야기를 좀 해야 할 듯싶습니다.

한국이 아시아 축구의 세계진출을 방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은 많이들 알고계시시라 믿습니다. 1948년 올림픽과 1954년 월드컵 개패는 본의 아니게 아시아 동지들의 출세길을 막고 맙니다. 헌데 변명을 좀 하자면 항상 우리 상대팀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떼로 보유한 명실 공히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여기서 할 소리도 아니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96년 이란도 조낸 쌨습니다!) 54년 월드컵 때 100% 온전한 전력의 헝가리와 붙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결과 0-9패. 또 48년 올림픽 스웨덴은 전설의 GRE-NO-LI 트리오를 보유하고 있었고 세 분이 우리에게 5골 합작해주십니다. 결과 0-12패. 불멸의 기록...

GRE-NO-LI 즉 그렌, 노르달, 리트홀름 삼인방 중 노르달은 올림픽 금메달 이후 아마추어 신분에 집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1949년 당시 유럽 최고의 프로 무대가 펼쳐진 이탈리아로 향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 그의 직업은 소방수였지요.

노르달의 맹활약에 고무된 클럽 수뇌부는 추가적인 스웨덴 선수 영입을 시도했고 대표팀에서 맹위를 떨친 그레노리 트리오가 밀란에서 다시 집결하니 결국 44년만에 이탈리아 왕좌에 등극, 소위 말하는 1차 밀란 황금기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거구에 유연함까지 자랑했던, 결국 오늘날까지 세리아의 레전드로 칭송되는 파워 포워더 노르달은 이후 총 5번 세리아 득점왕에 오르니, 그가 기록한 225골은 지금까지 세리아 최다골 랭킹 2위로 남아 있습니다.(#1은 실비오 피올라) 상대적으로 덜레전드인 나머지 두 분은 노르달을 어시스트하던 뛰어난 테크니션이셨습니다. 역쉬 축구는 골을 디따 많이 넣어야 오래오래 기억됩니다.

그렇다면 툴리파니와 그레노리 중 어느 쪽이 더 위력적이었다 평가될까요? 성적으로만 치면 비슷합니다. 다만 이탈리아인들은 세계대전 무풍지대란 행운 아래 정예 선수들을 사지로 보내지 않아도 되었던 스웨덴 같은 나라 선수들이 참전국 이탈리아에 와서 거둔 성적을 높지 않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도 죽어 나가 이탈리아 선수층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이거지요.

자존심하고는.... 그럼 세계대전으로 풍비박산 나버린 헝가리의 이민자들이 취미로 만든 축구동호회한테 이탈리아 프로팀들이 줄줄이 박살나던 현상은 어찌 설명될지...

최강 트리오.
사진출처. 애경 홈페이지http://www.aekyu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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