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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셋풋볼

양담배 컵 테니스 대회

                                                                                                              글쓴이: 골초 바셋

 

9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세계적 골초국가였던 한국시장 점령을 위한 다국적(사실상 미국) 담배회사들의 파상공세가 시작됩니다. 기억들 하실 겁니다. 어지간한 동네 슈퍼 간판이 삽시간에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프랑스, 독일에도 아직 없던 신상 말보루 미디엄까지 신속하게 상륙합니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국 농민들을 사랑한 저는 계속 88을 고집했지요. 단군 이래 최대 잔치, 서울 올림픽의 아이콘에서 삽시간에 촌스러움의 상징이 된 불쌍한 녀석이었습니다.

 

특히 필립모리스는 오랜 경험을 축척한 스포츠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슈가 ‘말보루컵 국제 테니스 대회’였지요.

 

유진선, 김봉수가 황혼기에 접어들며 테니스 르네상스 시대 끝자락을 간신히 붙들고 있던 한국 테니스계는 쌍수를 들고 이 대회를 환영합니다. 공식 ATP 투어 대회이긴 했지만 최하급 레벨이었던 대한항공컵이 전부였던 한국에겐 남에 돈으로 세계 톱랭커들을 초청할 좋은 기회였고, 더 중요한 건 이를 통해 마련되는 재원이었습니다. 올림픽 공원 테니스장이 눈썰매장이나 수영장으로 바뀌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테니스계에게는 이 대회가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기회로 그간 양담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시민단체들의 대대적 반격이 시작됩니다. 금연협회에서 기독교윤리회까지 단체란 단체는 모두 들고 일어나 대회 반대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정부의 사주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언론도 양담배 광고 대회의 부당함을 부르짖습니다.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정부는 대회를 불허하려 시도합니다.

 

결과적으로 대회는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 속에 강행됩니다. 미국 역시 정부차원에서 통상법 위반을 들어 항의하자 6공이 바로 꼬리를 내리지요. 이 국민의 건강권으로 위장한 무역전쟁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자 하나가 생겨납니다.

 

주최측은 대회의 흥행을 위해 개최국 한국의 에이스 ‘물고구마’ 장의종을 와일드카드로 참가시키려 했었습니다. 기량 면에서 김봉수, 유진선의 전성기를 진작에 넘어섰다는 평을 받던 20대 초반의 괴물로 김남훈, 지승호같은 동시대 스타 선수들은 말 그대로 쨉이 안 되었습니다.

 

장의종은 매국노급 지탄을 받고 결국 대회 출전을 포기합니다. 두둑한 대회참가 비용은 그를 돈만 밝히는 몰지각한 체육인으로 공격하는 구실이 됩니다. 국가대표란 성스런 이름을 더럽혔다 이겁지요. 이후 장의종은 선배들이 갔던 길과 비슷한 답답한 행보를 이어갑니다. 세계적으로 테니스의 인기가 폭발하던 시기, 말도 안 되는 ‘아마추어’ 논리에 묶여 아시아 지역 서킷 대회나 참가하다 은퇴합니다. 웃기는 건 그런 서킷 대회들 역시 대부분 담배회사 이름을 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도 신나게 개최를 유치하고 있었습니다. 셀렘 고양이, 말보루 고양이...

 

이 시기가 전미라 그리고 송형근 같은 세계적 유망주들이 마구 나타나던 바로 그 때입니다. 하지만 한국 테니스는 명분론에 막혀 절호의 기회에 결국 프로화, 국제화의 문을 열지 못했고, 불행히 우리는 그녀를 윤종신의 부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독자제위는 송형근을 아예 모르실 겁니다. 이 친구 땜에 전 유럽이 난리가 났었는데...

 

종편의 축구중계 이야기를 하려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제가 사상적, 개인 감정적 이유로 조선일보를 엄청나게 싫어합니다. 조선을 절독하지 않으면 손녀들을 데리고 본가에 가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불효성 협박을 부모님께 한 적도 있습니다. 이전 개인 블로그에서도 자주 그 취향을 노골적으로 들어 낸 기억이 있군요. 그 조선일보가 방송사를 만든다기에 당연히 반대했고, 그 방송사가 제 관심을 끌만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지 못함에 안도했습니다.

 

그런데 이거시 무슨 날벼락............!!!

 

포항과 전북의 TV조선 크리그 중계 데뷔 경기. 처음부터 끝까지 잘 봤습니다. 중계도 좋았고, 경기도 재밌게 지저분했습니다. 시청 중간 문득문득 혼란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면 20여 년 전 말보루 테니스 대회를 생각했습니다. 88을 사랑했으나 마침 테니스에도 미쳐있던 저는 말보루의 편에 있었지요. 담배는 차라리 건전성의 극치요, 도박회사, 사채회사가 후원하는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저는 자기세뇌를 시도합니다.

 

“넌 이미 전과가 있어, 도도한 척 굴지 말라고!”

 

30년대 영국에서 유행한 축구 담배. 본문 내용과 별 상관은 없음. 사진출처: www.epltalk.com